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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글. 쿠완 / 그림. 고양이

***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서 목소리를 주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 다리가 생긴 그녀는 왕자님의 곁에 갈 수 있었지만 그에게 제 마음을 전할 수는 없었어요. 목소리가 있다면 곁에 갈 수 없고, 다가간다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 둘 다 가지지 못하는 인어공주는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결국 그녀는 그를 죽이지 못한 마음과 칼을 품고,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답니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떨어진 다음 해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백 년에 한 번씩, 인어공주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소녀가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해 주었던 해안가로 떠밀려 온 거예요.

인어공주의 영향으로 소녀는 반인반어, 물을 뿌리면 다리가 지느러미로 변했어요. 또한 말을 할 수 없었던 인어공주의 한 때문에, 물거품에서 태어난 소녀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언령, 그녀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은 이루어졌답니다. 다만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인어공주와 같은, 열여섯이 되는 날 소녀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언령이 되어 백 년의 효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 대가로 소녀는-

 

 

 

“마리네뜨 아가씨!”

 

한가로운 오후, 으리으리한 성의 한쪽에서는 장소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푸른 흑발의 소녀와 그녀의 전담 시녀가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참을 쫓고 쫓기던 그들은 사이좋게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시녀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발소리가 멈추자 앞서 있던 소녀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마주잡고 불쌍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알리야, 제발! 한 번만 나갔다 올게!”

“안 된다니까요! 어제도 멋대로 나가셨잖아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건만, 친구 같은 자신의 시녀는 깐깐하기 그지없었다. 쪼잔해! 마리네뜨가 불평했다. 알리야는 무릎을 짚고 마리네뜨를 잔뜩 노려보았다.

소녀, 마리네뜨는 알리야가 숨을 고르는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이며 상황을 벗어날 만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 마리네뜨의 눈에 얼마 전 옆 나라에서 선물 받았다던 귀한 꽃병이 들어왔다. 아하!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꽃병이 있는 장식장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한참 뛰어다닌 탓에 몸을 숙이고 차오르는 숨만 뱉어내던 알리야는 시선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마리네뜨의 옷자락이 움직이자 재빨리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말썽쟁이 아가씨가 뭘 하려고! 그녀에게 당한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닌 알리야는 인상을 쓰고 그녀를 최대한 위협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마리네뜨가 행동을 멈출 정도였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알리야의 걱정대로, 마리네뜨는 고용인에게 좋을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지금 당장 자신이 도망치는 것만이 중요했다. 알리야가 보는 앞에서 마리네뜨는 꽃병이 있는 장식장을 발로 찼다. 구두 앞코에 전해지는 찌르르한 충격과 함께 장식장이 흔들렸다. 그 위의 아름다운 꽃병 역시 장식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다. 벌어지는 알리야의 입을 보던 마리네뜨는 발을 들어 한 번 더 걷어차고는 바로 몸을 돌려 뛰어갔다. 알리야는 도망가는 그녀를 보면서도 떨어지는 꽃병을 잡기 위해 몸을 날렸다.

 

미안, 알리야! 마리네뜨는 알리야를 등지고 도움도 되지 않는 사과의 말을 던졌다. 알리야의 초점이 무사히 받은 꽃병에서 긴 치맛자락을 순식간에 걷어 올리고 테라스를 훌쩍 뛰어넘는 마리네뜨의 뒷모습으로 이어졌다. 알리야는 목청껏 소리쳤다.

 

“마리네뜨 아가씨이이-!”

 

 

깊은 바다 속 같은 머리칼, 맑은 물빛 눈동자, 고운 산호초 같은 입술. 거기에 파도처럼 자유로운 성격까지. 바다를 옮겨다 인간으로 만든 것 같은 그녀는 물거품에서 태어나 왕국에서 관리되고 있는 인어공주였다.

 

***

영토의 반절이 해안가일 만큼 바다와 많이 접해 있는 왕국, 군사력도 기술도 상업도 무난하지만 평화롭기만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칭해도 좋을 왕국. 그리고 특이할 정도의 그 평화로움을 유지할 열쇠를 가진 왕국.

그녀가 살고 있는, 다소 특이한 이 왕국에서 마리네뜨는 그 ‘특이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리네뜨가 왕족이나 귀족도, 하물며 사용인도 아니면서 성에 머무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마리네뜨가 왕국에서 불리는 ‘인어공주’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이야기는 왕국에 내려오는 오래 전의 인어공주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뭍을 동경하던 인어공주가 지상의 왕자님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폭풍우 치던 밤, 인어공주는 사랑하던 왕자님을 구해줄 수 있었지만 그와 인연을 맺지는 못하였다. 그녀가 인간의 다리를 갖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바치고 왕자님을 찾아갔을 때, 인어공주가 구해준 그의 목숨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결국 사랑을 이기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어공주가 바다에 거품으로 사라진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고 떠내려 왔던 해안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떠내려 왔다. 소녀는 하반신이 물고기이고 상반신은 인간인,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왕, 인어공주가 사랑하여 찌르지 못했던 왕자는 소녀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옛날 비슷한 아가씨를 데려왔던 추억 때문이었다. 소녀가 인어공주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 국왕은 알지 못했다. 알 방법도 없었다. 다만 그는 무엇에 끌리듯이 소녀와 친해졌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이 보기에 허락될 수 없는 선까지 깊어졌다.

소녀와의 관계를 안다면 그의 왕의 자질에 대해 지탄할 사람들은 많았다. 국왕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그는 소녀와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게다가 소녀에겐 그녀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국가적 메리트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끊어내야 하는 쪽은 소녀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가 바라는 선택이었다.

 

어느 쪽이 나라에 이득이 되는가. 그것을 모를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왕이 되지도 못했을 터였다. 자신의 선택에 다른 사람들의 생활, 크게는 목숨까지 걸리는 자리는 분명 무거웠고, 짊어지기 위한 능력이 필요했다.

국왕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웃 나라 출신의 왕비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소문이 돌자 이웃 나라에서는 친목을 다진다는 구실로 사신을 보내왔다. 말이 친목이지, 그들은 분명 왕비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 어긋남이 생길 것은 분명했다.

 

자신과 나라의 행복,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왕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밑의 가시밭길이 발을 넓히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로. 현명한 왕이라 불렸던 그는 점점 신하들에게 신망을 잃었고, 이웃 나라와의 관계도 틀어졌다. 최악으로 불안해진 나라의 상황에 주변의 국가에서 침략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흉흉히 퍼졌다. 인어공주가 사랑했던 그는 점점 무능한 왕이 되어갔다.

 

그리고 대신 끝을 낸 것은 그를 사랑했던 인어공주, 소녀였다.

 

소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만 봐야 했던 인어공주의 영향일까. 인어공주의 물거품에서 태어난 그녀의 말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는 힘. 다만, 자신을 대가로-

그녀의 언령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열여섯 살이 되는 날부터였다. 열여섯은 인어공주가 자신이 태어났던 바다에 물거품으로 몸을 바쳤던 나이이기도 했다. 제 힘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소녀는 불안한 나날에도 자신의 생일만을 기다렸다. 진작부터 생각했던 그녀의 결심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던 날 밤, 소녀는 왕의 방을 찾아가 입술을 뗐다. 간절함이 깃든 목소리가 말의 힘을 증명하듯 울려, 그녀는 마지막 사랑의 속삭임도 전에 왕을 위한 선택을 입에 올렸다. 그것은 왕이 살아갈 나라의 평안-.

왕이 물거품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몸을 껴안는 가운데 소녀는 제 목숨을 바치고도 웃어 보였다. 왕국의 첫 번째 인어공주가 그렇게 물거품으로조차 흔적도 남지 않게 된 바로 그 날, 왕국을 위협하던 모든 것들이 흔적도 남지 않고 쓸려갔다. 거친 모래사장을 단번에 정리해 버리는 파도처럼, 소녀의 목숨을 바친 바람이 쓸고 간 후 왕국에는 백 년이라는 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동시에 인어공주가 사랑했던 왕도 나라를 최고로 현명하게 다스린 왕으로 기록되었다.

 

사라진 인어공주와 왕의 인연, 그것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평화. 왕국의 사람들은 그 힘을 탐냈다. 그녀의 능력이 계속된다면 갈등 없이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주변국들에 비해 특출나게 강하지는 않은 나라여서 늘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국민들은 두 손을 모아 왕과 인어공주를 칭송하며 그녀의 능력을 계속해서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이미 물거품으로 져버렸고, 길었던 백 년의 평화는 역사 속에 짧게 남게 되었다.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인어공주와 맺었던 연이 한 순간의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인어공주가 사라진 날로부터 딱 100년째 되는 날, 이상할 정도의 잔잔한 일상의 끝과 동시에 바닷가에는 새로운 반인반어가 떠내려 왔다. 왕국에서 평화를 위해 인어공주를 관리하는 일의 시작이었다.

 

몇 번을 반복하며 전해지는 기록으로 왕국의 사람들은 물거품에서 나오는 소녀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리가 물에 젖으면 인어로 변하는, 반인 반어인 소녀는 나타날 때에는 일곱 살, 열여섯 살이 됨과 동시에 언령의 힘을 쓸 수 있고 언령은 쓸 때마다 소녀가 그 대가를 받았다. 언령의 효력은 딱 백 년 동안, 소녀들은 열여섯 살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인어가 되었을 때에 지느러미의 무늬와 색깔이 선명해졌으며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은 진주가 되었다.

그리고 소녀가 사용하는 언령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지에 따라 효과를 발휘했다.

 

왕국에서는 그녀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먹을 생각을 했다. 소녀들이 스스로 왕국의 평화를 원하게 하기 위해서,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주무르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소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행해지는 시도들이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지난 백 년의 고요한 평화에 취해 그녀가 희생하기를 바랐다. 그 결과로 왕국에서 도출한 답은 잔인했다.

 

의도적으로 그녀가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 어렸을 때부터 데려와 빤한 속내를 감추고 그녀에게 사랑을 쏟아부어줄 연기를 할 이들을 구해, 소녀가 열여섯 살이 되는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소원을 빌게 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생겼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언령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소녀가 생겨나자 그 후로는 소녀들의 목숨이 16살까지라는 시한부 인생마저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우습게도 인간관계를 이용하자는 이 잔인한 생각은 맨 처음 언령을 사용했던 인어공주와 왕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목숨을 건 그 선택이 손조차 쉽게 대지 못하던 나날 끝에 나온 것인지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감정을 이용한 그 방법이 잘 먹혔기에 소녀의 의지를 생각해줄 사람은 더욱 없었다.

 

십 대 중반, 사랑이 전부라고 믿을 어린 생각을 가진 소녀를 휘두르는 것은 쉬웠다. 왕궁 안의 사람들은 소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스타일, 다양한 연령대, 심지어 같은 성별의 사람까지도 불러들였다. 일부러 접근하는 것이 티가 나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장하기 위해 모으는 사람들은 주로 귀족 집안의 둘째, 셋째들이었다. 그들은 모여 소녀의 환상에 맞도록 자신을 가꿨다. 소녀의 상대로 결정되면 집안에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들 나름으로도 필사적이었다. 결코 강대국이 아닌 나라의 백 년의 흥망이 결정되므로 왕국에서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적지 않았다.

 

소녀는 언령의 효력이 끝나고 나서야 일곱 살 모습으로 해안가에 나타났다. 때문에 그녀가 열여섯이 될 때 까지는 인어공주의 말의 힘에서 벗어나는,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공백기였다. 때문에 다른 때는 평화롭지만 공백기의 시기에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나 흉년, 도적떼가 나타나는 등의 위험이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인어공주가 나타날 즈음이면 왕국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졌다. 공백기 동안 인어공주를 이용할 사람을 뽑고, 다른 나라를 견제하고, 흉년에 대비한다. 왕국에서는 그렇게 백 년 하고도 십 년이 채 안 되는 시간동안 비슷한 일들이 이루어졌다.

 

왕국에서 소녀의 지위는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왕은 없어도 인어공주는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 정도의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왕족들조차도 소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더 위라고 착각하고 왕족에게 예의 없이 대한 선례가 있어 소녀의 예절교육 등은 그녀가 애착을 가진 사람이 맡아 실시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왕족과 소녀는 잘 만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왕족들이 소녀를 인간이 아니라 소모품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는 이유도 있고, 곧 죽을 사람과 오래 보기 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의 힘을 두려워한 왕족들이 그녀를 꺼려하기도 했다. 그녀의 힘이 일반적이지 않은, 마녀의 힘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았다. 왕족들에게 소녀는 그 능력이 왕국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배제해 버렸을 존재였다.

 

 

환영받는 듯 하면서도 외롭고, 그러면서도 왕국에 꼭 필요한 소녀. 물거품에서 나온 소녀를 왕국에서는 인어공주라고 불렀다.

 

***

 

마리네뜨는 열다섯 살로, 현재 왕국의 인어공주였다. 그녀 역시 중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왕국에서 중요한 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다른 인어공주들처럼 그녀를 위한 별궁과 전속 시녀, 웬만한 것은 원하기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권력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인어공주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리네뜨에게는 그녀의 의지를 조종할 쓸모없는 애착 관계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어공주를 이용할 체제가 잡히면서부터 사람들은 모든 인어공주들에게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연인의 역할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것이 시녀장이라던가, 어느 백작의 둘째 아들이라던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할 포용력 높은 보호자의 역할을, 다른 사람은 그녀의 취향에 맞는 자신을 연기해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 같은 완벽한 연인 역할을. 그들은 인어공주를 얌전하게 행동하도록, 말을 잘 듣도록 이중으로 옭아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리네뜨에게도 그런 사람들은 붙었다. 어린 모습으로 처음 왕궁에 왔을 때에 그녀가 옷자락을 쥐었던, 단 냄새를 풍기던 급사실의 젊은 보조와 돈으로 지위를 사 귀족의 반열에 발을 내민 졸부 집의 셋째 아들이 그 상대였다. 그럼에도 왜 지금 그녀가 통제 불가능한 말괄량이로 여겨지느냐 하면, 그 두 사람이 마리네뜨에게 끼친 영향이 좋은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호자 역할로 준비하고 있던 시녀들 대신 달콤한 냄새에 끌려 잡아 버린 옷자락의 주인은, 어릴 적부터 특기인 요리만을 갈고닦아 젊은 나이에 왕궁에 들어오게 된 여자였다. 아이를 다루는 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그녀는 뜻하지 않게 선택받고도 마리네뜨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대가 되었던 이는 마리네뜨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던 소년으로, 인어공주의 상대 후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는 장난기가 많아 마리네뜨를 잘 웃게 한다는 이유로 많은 후보들 중 선택되었다.

 

인어공주를 위해 준비된 별궁에 들어오고 나서 마리네뜨는 한동안 다른 인어공주들처럼 꾸며진 행복 속에서 살았다. 애초에 인어공주는 물거품에서 태어나 사람의 손길을 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손길이 가짜라도 달게 받을 소녀들이었다. 마리네뜨 역시도 오직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상황에서 행복하다는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의 가짜 행복은 금방 깨져 버렸다.

 

마리네뜨가 굉장히 의지하고 따랐던, 그녀를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었던 젊은 요리 보조는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마리네뜨에게 언제나 상냥했던 연인 역할의 소년은 어린 마음에 자제하지 못하고, 네가 마녀 같다는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 마리네뜨에게 상처를 주었다.

 

처음 배운, 믿었던 행복이 깨지던 순간을 마리네뜨는 어릴 적 겪었다. 어린 그녀를 지탱해 주어야 했던 두 사람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왕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보내 새로 그녀의 호감을 사려 했다. 마리네뜨가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은 들어맞았다. 마리네뜨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시키는 행동은 반대로 하기 시작했다. 이전 인어공주들의 경우에는 그녀들을 통제할 수단이 있었지만 마리네뜨에게는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마리네뜨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명령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닌데다 사람을 믿지도 않게 된 탓에 그녀는 커 갈수록 제멋대로 행동했고, 열다섯 살의 지금은 왕국의 성 안에서 유명한 말괄량이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열여섯이나 되는데, 어쩜 이렇게 말괄량이신지!”

 

왕궁 안에서 마리네뜨를 아는 시녀들은 열에 아홉은 이렇게 불평했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혀 놓으면 찢어먹기 일쑤에,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든 나가 버리고, 얌전히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상 위에 흩뿌려 놓았다. 기본적인 것들조차 지키지 않으니 그녀에게 품위나 교양 있는 모습을 바라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왕궁이니만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자주 오고갔기 때문에 그녀의 자유분방하다 못해 예의 없는 모습은 자주 문제로 제기되고는 했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사용인들이었다. 마리네뜨에 대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관리하다시피 하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곧 그들의 처벌로 직결되었다. 겁을 먹거나, 짜증이 난 사용인들이 몇 번이나 마리네뜨를 잡아두고 행동을 교정하려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그녀는 기막히게 빠져나갔다. 길다란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면서도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는 왕궁 안의 무법자였다.

 

사용인들이 왕족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거라곤 그녀의 죽음에 대해 포장하는 일 뿐이었다. 열여섯 살 까지 난동을 부리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후의 죽음은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용인들은 마리네뜨가 삶에 대한 미련이나 즐거움을 가지지 않게 하도록 노력했다. 덕분에 마리네뜨는 자신의 운명이 열여섯 살 까지라고 교육받아왔고, 죽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열여섯이 되기 전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의지는 강했다.

 

 

 

어느 오후, 마리네뜨는 여느 때처럼 왕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매일매일 사용인에 의해 규칙성 있게, 그리고 레이디가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시간으로 짜여 있었다. 그러나 마리네뜨가 계획표를 따른 적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배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심심할 때에 슬쩍 가서 수업을 망쳐 놓을 목적이었다.

 

오늘 그녀의 일과는 재미없는 예의범절과 자수 따위로 채워져 있었다. 그 일과를 따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마리네뜨는 자신만의 놀이를 찾아 시간을 보내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견한 오늘의 놀이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받는 것이었다. 마리네뜨는 신발도 벗어 놓고 맨발을 풀물에 적셔 가며 나뭇잎을 열심히 받았다. 받은 나뭇잎은 애써 손바닥 위에 앉았던 보람도 없이 다시 땅으로 떨어져 잔디로 빼곡한 바닥과 색을 같이 했다. 그녀는 나뭇잎을 받을 때마다 수를 셌지만, 잠시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는 틈에 금세 잊어버렸다. 그러면 그녀는 다시 수를 세며 나뭇잎을 쫓아다녔다. 의미 없는 행동이지만 그녀는 매우 만족해 웃었다. 마리네뜨에게 놀이는 원래 의미 없는 행동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놀던 마리네뜨는 곧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쫓느라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발이 제법 피로했다. 마리네뜨는 나뭇잎 사이로 새는 빛을 그 아래에서 감상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비가 왔으면. 나뭇잎을 받았던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물을 모두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래서 마리네뜨는 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희고 고운 손바닥에 빗방울 대신 맑은 하늘의 나뭇잎 그림자가 겹쳐 떨어졌다. 그녀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소리 내어 말한 탓에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풀들이 술렁였다.

 

한편, 마리네뜨의 등 뒤, 그녀가 기댄 나무의 반대편에서 그녀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리네뜨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그는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로, 이웃나라와의 혼담 문제로 자리를 비웠었던 아드리앙이었다. 중요한 일로 멀리 이웃나라까지 원치 않는 걸음을 했던 그는 어젯밤 늦은 시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사실, 왕자라는 위치 때문에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여유나 부리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담으로 이야기가 중요하게 오가는 지금, 그의 역할이 핵심인 만큼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가 베풀어졌다.

 

아드리앙은 두 나라를 오가느라 지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조용히 독서를 하기를 원했었다. 그래서 그는 사용인들이 가득한 그의 개인 서재 대신, 인적이 드문 정원을 선택했다. 나무 밑은 책을 읽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림자와 햇살은 글씨 하나하나를 밝게, 혹은 어둡게 정반대로 비췄다. 게다가 중간에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 준비된 찻잔도, 아드리앙이 좋아하는 차의 향긋한 냄새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드리앙은 그것대로 만족했다. 사람에 잔뜩 치이며 타지 생활을 했던 탓일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자신이 살펴지고 있는 것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외로움에 가까운 시간으로 그는 목을 축였다.

 

아드리앙에게는 달갑지 않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혼자 차지하던 공간에 다른 사람이 발을 들였다. 자신의 의사도 없이 짜여진 스케줄은 내던져 버리고 스스로 제 할 일을 선택하는 인어공주, 마리네뜨였다. 공교롭게도 아드리앙이 선택한 정원은 인어공주의 별궁과 가까워 마리네뜨도 자주 찾는 곳이었다.

시녀들은 제 할 일만도 바쁘고, 왕족들은 인어공주인 그녀를 꺼림칙하게 생각해 다가오지 않는다. 혼자인 것이 당연한 마리네뜨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었다. 그녀는 신이 나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를 향해 달려오며 신발을 벗어던졌다. 실용성과 관계없이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려 있던 신발이 나무를 통해 아드리앙에게 둔탁한 충격을 전했다.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만 알았던 아드리앙은 그 뒤에서 책을 든 채로 미동 없이 그녀가 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바스락, 풀잎을 밟는 소리가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만큼 잘게 들렸다. 반복해서 수를 세는 목소리는 맑아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고, 움직임에 스치는 옷자락이 바람마저 연주했다. 어느새 혼자 있고 싶었던 마음마저 잊고 그녀에게 모든 관심을 쏟던 아드리앙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아드리앙은 부는 줄도 몰랐던 바람이 그녀의 무거운 치맛자락을 들추고 그가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도 넘겼다. 나뭇잎을 받으려 팔다리를 허우적대고 있는 그녀는 꼭 요상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성 안에서는 시녀에게마저 찾는 품위나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모양새였다. 아드리앙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비볐다.

 

인어공주는 나라의 중요한 존재이고, 때문에 왕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산다. 그녀는 아드리앙이 자주 봐 왔던, 잘 차려입은 동년배의 여자 아이들과 같이 최고급품의 드레스와 반짝거리는 것들로 이루어진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너무나 이질적이게도 그녀가 보이는 행동은 얌전과 거리가 멀었다.

 

한참 요상한 행동을 하며 놀던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이 앉아있는 나무에 가까이 와 털썩 주저앉았다. 뭉개진 풀 냄새와 흰 레이스 치맛단, 햇살이 부서진 머리가 가까이에서 반짝거렸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던 아드리앙은 수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까 봐 슬쩍 그녀와 정 반대편으로 몸을 꽁꽁 숨겼다.

 

방금 전까지 활달하게 놀아서 지친 걸까, 그녀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나서는 얌전했다. 아드리앙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장을 몇 페이지 넘기다가 그냥 덮어 버렸다. 그는 어느새 자신이 마리네뜨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혹시 잠이 든 건 아닐까. 고개를 드는 호기심에 아드리앙이 살짝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마리네뜨의 고운 목소리가 퍼졌다. 타이밍 좋게 들려온 목소리에 아드리앙은 잠깐 굳어 있었다. 뜬금없이 비인가. 마리네뜨의 행동에 여전히 관심이 있는 아드리앙은 슬쩍 엿본 옆모습으로 그녀가 빗물을 받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뛰어놀던 마리네뜨를 따듯하게 비추던 태양빛은 지금도 나뭇잎 사이로 열심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리네뜨는 손을 뻗은 채 꿋꿋하게 기다렸다.

인어공주가 언령의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드리앙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기로 마리네뜨의 나이는 언령을 쓰기엔 아직 모자란 나이였다. 아직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저 소녀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손을 뻗고 비를 기다렸다.

 

말의 힘이라는 거, 꽤나 센 게 아닐까. 얼마 안 있어 내리기 시작하는 굵은 빗방울에 아드리앙은 놀라 마리네뜨를 쳐다보았다. 비가 오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바람은 태양빛과 함께 불고,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특이한 모양을 만든다. 마치 소녀의 바람을 들어 준 것처럼, 달라진 것은 비가 내리는 것 하나 뿐이었다. 햇빛과 함께 그녀를 위한 빗방울이 겹겹이 쌓인 나뭇잎의 모양을 따라 내렸다. 그리고 소녀는 내민 손에 기다렸다는 듯이 빗방울을 받았다.

 

때마침 비가 온 것은 우연이겠지만, 아드리앙의 눈에 소녀는 굉장히 신비롭게 보였다. 아드리앙은 그녀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내리는 비를 자신도 맞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빗줄기는 굵었고, 잔잔히 내렸다. 홀린 것처럼 그녀를 보던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져 옷을 적시는 것을 알아챘다. 아드리앙은 비를 맞고 있는 레이디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배운 적이 없었다. 그는 멍한 정신으로 비를 막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는 아주 갑작스럽게 내렸고, 휴식을 목적으로 나왔던 아드리앙이 우산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아드리앙은 비에 젖고 있는 레이디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드리앙은 반쯤 생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마리네뜨에게 말을 거는 대신 조용히 다가가 들고 있던 책을 머리 위에 들어 주었다. 얼마 되지 않는 면적이었지만 그녀에게 스며들 예정이었던 빗방울이 책 표지에 대신 내려앉는 것을 보며 아드리앙은 만족했다.

 

마리네뜨는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잘 느껴지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책으로 머리 위를 가려주던 아드리앙과 눈이 마주쳤다. 마리네뜨는 눈을 피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 비를 막아주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리네뜨에게 호감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많았다. 반쯤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왕국에서는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괴상한 만남을 추진하곤 했다. 그래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도 그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왕족이 그녀를 만나기 꺼려하는 만큼 마리네뜨가 그들과 접촉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먼발치에서 저기에 있다는 것을 몇 번 실감한 정도일까. 때문에 마리네뜨에게 왕국의 왕자에 대한 정보가 많을 리 없었다. 그녀는 아드리앙이 왕족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오직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 가장 잘생기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요상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던 중, 다른 생각을 꿈꾸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끊은 것은 마리네뜨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던 표정 그대로 손을 움직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표정 아래 아드리앙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드리앙이 놀라 바닥을 한 번 보고, 다시 마리네뜨를 보았다. 그의 반응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 마리네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친절을 보여주는 책을 바닥에 팽개쳐 놓고 시선조차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뛰어서 나무 밑을 벗어났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도망을 가나 싶었지만, 도망은커녕 그녀는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비를 맞는 모습을 보였다. 아드리앙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에게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아드리앙은 잠시 당황했다. 이번 인어공주가 평소 그가 들어왔던 인어공주들과 다르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막 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마리네뜨가 내던진 책과 주변에서 난동을 부리는 마리네뜨를 번갈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아드리앙은 일어서 옷을 털고 그녀를 따라 나무 밑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왔다. 나뭇잎에 여과되어 떨어지던 것보다 많은 빗방울이 그를 덮쳤다.

 

그녀는 왕국에 매여 있으면서도, 이 안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녀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 들까.

아드리앙은 어설프게 팔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흥미와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그 행동은 의미가 없는데도 반복할수록 유쾌했다. 풀 냄새가 흩어지고, 비 때문에 옷이 무거워졌다. 그는 어느새 마리네뜨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를 맞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이고, 오히려 옷이 젖어 기분이 나쁜데도 아드리앙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사람을 보낸 건지 몰라도, 그녀의 흥미를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냈던 사람 중엔 최고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마리네뜨는 어설프게 자신을 따라하는 아드리앙을 보며 생각했다. 그를 여전히 왕국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마리네뜨는 속으로 아드리앙에 대한 평가를 올렸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다들 상냥했지만 그녀의 기이한 행동에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예의 없이 굴면 찌그러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떨어지지는 못했다. 이번에 그의 책을 던져 버리는 난동을 부리면서 마리네뜨는 속으로 이 사람도 금방 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함께 비 속으로 들어와 같이 옷을 더럽혔다. 그녀가 던진 책도 놀랐다는 듯이 보기만 할 뿐, 언짢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재미있는 사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헤어질 때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었고, 동시에 마음속에 조그만 호감을 품게 되었다.

 

***

 

“알리야, 듣고 있어? 그래서 아까 비가 왔는데,”

“잘생긴 괴짜를 만나셨다는 말이죠. 열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요. 그보다 아가씨, 안 주무실 거예요?”

 

아드리앙을 만난 날 밤, 마리네뜨는 간만에 사고를 치거나 방을 탈출하지 않아 알리야에게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대신 알리야를 상대로 아까 있었던 일을 떠드는 중이었다. 다만, 같은 이야기를 성에 찰 때까지 하려고 드는 바람에 알리야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알리야는 그녀의 이야기가 반복될 때마다 수도 없이 하품을 했다. 흥미롭게 들어 주었던 거야 처음 몇 번이었지, 지금은 오히려 귀찮았다. 꼭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굴고 말이지. 잠깐, 짝사랑?

 

마리네뜨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알리야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현재 마리네뜨에게는 그녀를 통제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알리야와 가장 사이가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듣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인어공주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골머리를 썩혔다. 마리네뜨가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바쁜 것은 알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드디어 연인의 역할이 나타난다면? 마리네뜨가 연애사업에 뒤늦게 빠진다면 일을 줄여 알리야를 도와주는 일과 동시에 왕국의 큰 고민덩어리를 하나 떼어내는 셈이었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 확정된 그녀에게도 행복한 마지막이 될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알리야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했지만 전부 지워 버리고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서 만났다고 하셨죠, 아가씨? 이름은? 신분은?

 

“자주 가던 정원에서 만난 사람이야.”

“......”

“......”

“...그리고요?”

“그게 다야!”

 

아이고, 머리야. 알리야는 몸에서 기운이 빠져 마리네뜨의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과 마리네뜨의 앞날이 조금은 편해지기를 기대했건만.

당당하게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으면서, 마리네뜨는 알리야의 속도 모르고 그녀가 관심을 가져 준 것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러던 중, 마리네뜨가 꿈꾸듯이 떠올리며 말한 상대에 대한 묘사에서 알리야의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이름도, 직업도, 신분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엄청 잘생겼다는 건 알아. 그리고 재미있는 사람이야.”

“아, 예...”

“진짜인걸. 머리카락은 꼭 태양 같은 금발이고, 눈은 아름다운 초록빛이고...아, 키도 컸어!”

“아...예?! 아가씨, 좀 더 말씀해 주세요!”

 

마리네뜨가 말하는 그의 설명을 들은 알리야는 뭔가 아는 것이 있는 듯 옷차림에서 어디에 있었는지까지 꼬치꼬치 물어보기 시작했다. 불같은 그녀의 반응에 마리네뜨는 얼떨떨하게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함께 품은 채로.

 

마리네뜨는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초롱초롱하게 알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리야에게서 나온 것은 기대 이상의 단호한 저지였다.

 

 

알리야는 마리네뜨와 동년배의 시녀로, 깔끔한 일처리와 빠른 눈치로 주위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같은 나이임에도 인어공주의 전속 시녀라는 자리를 꿰찼다는 것은 그녀가 주위에서 얼마나 인정받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마리네뜨에게는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인어공주가 알리야와 함께 있으면서 치는 사고가 그나마 줄어들자 불만의 소리도 작아졌다.

 

무엇보다도 알리야가 전속 시녀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적당한 포용력과 단호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어공주에 대한 애정도 있었고, 같은 나이에서 형성할 수 있는 공감대와 친밀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 효과로, 알리야가 오고 나서 특히나 그녀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달가워한 것은 마리네뜨였다.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인어공주에게 친구 같은 존재가 생긴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다만 아주 약간의 문제는 둘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알리야도 처음과 같은 단호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알리야는 본인이 우기는 것보다 마리네뜨에게 무른 면이 있었다. 그것이 인어공주로서의 마리네뜨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간 정이 들어서인지는 알리야 본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행동을 해도 그녀를 밉게 볼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때문에 알리야는 마리네뜨에게 진지하게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다. 마리네뜨가 사고를 쳐서 자신이 혼이 난다고 해도 그녀는 끝에 가서 웃어넘기곤 했다. 마리네뜨는 나라의 흥망을 쥔 인어공주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나 조금 있으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알리야의 친구였다.

 

그래,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생, 그것도 대를 위해 희생해야 할 히어로 같은 소녀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알리야도 강경했다.

 

“안 돼요!”

“대체 왜!”

“글쎄 그 분은 왕족이라니까요!”

 

마리네뜨는 중요한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왕국에서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왕족이라니. 마리네뜨가 그에게 푹 빠진 것은 딱 보이지만 왕국에서 환영할 일도 아닐 뿐더러 상대인 아드리앙의 생각이 어떤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공백기 동안 왕국이 약해졌기 때문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와 동갑인 어린 나이임에도 이웃 나라의 공주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무리해서 진행시킨 혼담의 이유는 이번 인어공주를 이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리네뜨에게 애착 대상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가 언령으로 왕국의 평화를 빌지 않을 수도 있었고, 왕국에서는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국을 도와줄 정도의 힘이 있는 이웃 나라의 하나뿐인 공주 클로이 부르주아는 어릴 적부터 아드리앙과 알아왔던 사이인데다 그에게 충분히 관심이 있었다. 왕국에서는 그 점을 이용해 두 사람을 결혼시켜 관계를 돈독히 하고 미래를 대비하고자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아니던, 그의 의지가 어떻게 되었던 아드리앙에게는 결혼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알리야는 그런 그와 만나서 마리네뜨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절-대 안 돼요! 때문에 떼쟁이 인어공주가 바닥에서 구르던 베갯잇을 쥐어뜯던 알리야는 이를 악물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녀가 힘껏 반대하자 마리네뜨는 이제 감정을 감출 생각도 없이 눈물까지 짰다. 마음이 아팠지만 알리야는 자신의 반대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로 입술을 물었다. 이건 내가 바라는, 당신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필사적으로 되뇌면서.

 

***

 

알리야의 반대와 함께 평소보다 감시가 엄중해진 지 사흘째. 마리네뜨는 숨어들어간 빨랫감 더미를 쌓아놓는 바구니에서 아드리앙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별궁에서 무사히 탈출하면 도망가서 아드리앙을 만나야지. 떠오르는 그의 얼굴에 마리네뜨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녀는 요 며칠째 알리야와 대치하고 있었다. 알리야가 아드리앙을 절대로 포기시키려는 만큼, 마리네뜨도 절대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알리야의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말을 들을 생각이 없던 마리네뜨는 평소 때보다 훨씬 난동을 부렸다. 떼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눈물까지 보여도 알리야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궁을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알리야가 이상할 정도로 단호했기 때문에 설득시키려고 노력했을 뿐, 사실 마리네뜨에게 별궁을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쉬웠다. 평소에도 시녀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특기였던 그녀는 자랑하는 손버릇으로 몰래 열쇠를 훔쳐 방을 빠져나가 아드리앙을 만나러 신이 나 발을 옮기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매일 아드리앙을 보러 갔다. 막상 만나면 얼굴만 봐도 부끄러워서 말을 더듬고, 갈 곳 잃은 손만 바쁘게 허우적대면서도 그를 지켜보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스토커 기질이 있는지, 마리네뜨의 행동은 그를 만나러 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끔은 아드리앙의 뒤를 밟기도 하고, 업무를 보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하면서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 대한 감정을 점점 확실히 하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맑은 하늘과 내렸던 빗속에서 그녀가 발견했던 것이, 어릴 적 상처받아야 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귀퉁이라는 것을.

 

 

 

만일 일상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라면, 지금 아드리앙이 올라탄 바퀴는 분명 아주 커다란 톱니바퀴일 것이다. 다른 조그만 바퀴들이 몇 번이나 바쁘게 돌아갈 때, 홀로 한 칸을 내딛는. 나라 밖의 상황도, 왕궁 안도 매일이 변화로 바쁠 동안 마리네뜨를 만난 아드리앙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매일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귀신같이 찾아내 달라붙어 왔다. 집무실이든, 서재든, 그의 방이든. 지위에 비례하는 일거리의 높이에 아드리앙이 그녀를 모른척하면 마리네뜨는 슬쩍 다가가 그의 곁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곤 했다. 제 딴에는 몰래 하는 행동인지 이동하는 아드리앙을 따라갈 때면 장식장 뒤에 숨어가며 쫓아왔다. 스토커 기질이 다분한 행동이지만 가장 중요한, 자신을 감추는 법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 같은 티가 나 오히려 귀여웠다.

 

마리네뜨가 나타나면 주변의 반응도 우스웠다. 언제나 품위나 교양 따위를 먼저 찾던 사람들은 왕궁 안에서 누구보다 품위도 교양도 없지만 지위로 찍어 누르기에도 함부로 훈계를 하기에도 애매한 그녀에게 쩔쩔맸다. 게다가 오로지 아드리앙에게만 집중하는 마리네뜨는 그가 제지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그를 업무에서 빼내어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핑계거리이자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아드리앙도 그녀를 크게 말리지 않았다.

 

아드리앙은 그렇게 괴짜 소녀의 행동에 웃음부터 내면서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아드리앙을 막았던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고, 혼자라면 지나칠 사소한 것들은 모두 특별해졌다. 그녀가 찾아온 지 오래지 않아 아드리앙은 매일 마리네뜨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드리앙에게는 언령 없이도 매일이 평화롭던 나날의 연속, 걱정이 없을 것만 같던 앞날에 현실이 끼어들었다. 현재 왕국의 왕이자 아드리앙의 아버지인 가브리엘 아그레스트가 그를 호출한 것 때문이었다. 그가 이야기 할 주제는 안 봐도 뻔했다. 인어공주인 마리네뜨에 대한 이야기겠지.

 

그녀가 별궁에서 나와 아드리앙의 근처에서 기웃대기 시작하고 나서 이미 소문은 퍼지고 있었을 터였다. 인어공주가 애정을 보이는 것이 왕자라고. 현실을 되짚어보며 아드리앙은 그의 아버지가 내릴 명령을 예상했다. 아마 그는 아드리앙을 이용해 마리네뜨에게 왕국을 위한 소원을 빌게 하겠지. 왕국의 앞날을 위해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들을 이웃 나라와의 혼담에 집어넣는 사람이다. 만약 그것이 왕국을 이끌 아들의 앞날에 대한 대비라고 해도 아드리앙은 그의 방법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왕이 있는 방 앞, 신하가 아드리앙의 방문을 알렸다. 육중한 철문의 너머 왕좌에 앉아 있는,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드리앙은 달갑지 않았다.

 

***

 

아버지와의 만남의 시간은 최악이었다. 처음, 대답을 바라지 않는 가벼운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일방적인 명령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드리앙이 예상했던 것과 꼭 같았다.

 

그녀가 네게 애정을 보이는 것은 좋은 모습이니 이용해라. 그대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열여섯 생일에 나라를 위한 언령을 사용하게 할 수 있도록. 원래 왕족이 인어공주의 상대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인어공주의 허튼 짓을 막을 수 있다면야.

 

“너는 그녀를 통제하는 브레이크가 되어야 한다. 그게 지금 너의 역할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아드리앙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겨우 그의 말에 수긍했다.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을 아프도록 때렸지만 그는 꾹 눌러냈다. 아버지의 싸늘한 눈길과 차가운 말은 그에게 약점과 같았다.

 

“보아하니 너도 마음이 있는 모양인데 그녀는 곧 죽을 사람이니 마음을 주지도, 갖지도 마라.”

 

왕국을 위한 언령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이웃 나라와의 혼담을 깨도 상관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드리앙도 약혼자에게 얽매여 마리네뜨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주지 말라는 이유가 그녀를 이용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아드리앙은 마음이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왕이 했던 충고를 빙자한 명령은 아드리앙을 더욱 슬프게만 만들었다.

 

 

 

아드리앙은 무겁게 닫히는 문을 뒤로 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곧 죽을 사람이니 마음을 주지도, 갖지도 마라. 돌아서는 뒤통수에 결정적으로 꽂히던 아버지의 말이 걸음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는 왜 아드리앙의 인생 뿐 아니라 감정마저 통제하려 드는지. 매 순간을 느끼는 것도,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아드리앙 자신만의 것인데. 아드리앙은 머리에 손을 넣어 헝클어뜨렸다. 엉키는 머리카락보다 생각은 더 꼬여 있었다.

 

마리네뜨를 만나고, 호감을 키우게 되면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다. 왕족들은 인어공주와 엮이는 것을 되도록 피했다. 신비한 힘을 사용할 나라의 주요 인물이지만 그 힘이 자신들에게 해악을 끼칠까 봐 몸을 사리는 것이기도 하고, 죽을 거라고 결정된 사람과 정이 들면 그녀가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어서였다. 그래서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와 친해지게 되는 것도, 사실상 만나게 되는 일 자체도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만났다. 주변의 사건사고로 그녀가 의지할 곳 없는 말괄량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드리앙이 혼담 문제로 이웃 나라에 갔어야 했고, 마리네뜨가 자주 가던 인적 드문 정원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고도 힘들게 만나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조차 뚜렷한데, 상황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드리앙은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사람이었고, 마리네뜨는 그를 위하여 죽게 될 입장이었다. 마치 옛날 언령의 힘을 처음으로 받았던 왕과 인어공주의 상황 같았다.

 

그의 아버지이자 현왕, 가브리엘에게 그녀를 이용하라는 말을 듣고 난 아드리앙은 가슴 속이 엉망이었다. 그녀를 이용하여 왕국에 득이 되게 한다니. 긍정의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말에 대답한 것이 마리네뜨와 즐겁게 지냈던 시간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아드리앙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마음에 대고 물어본다면 답은 확실한데, 그 답은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꼭 같았다. 마치 자신이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지금 그녀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도 자신의 태도가 거짓같이 느껴질 것이다. 아드리앙은 일부러 걸음을 더 빨리했다.

 

“아드리앙-!!”

 

그런 아드리앙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뒤쪽 멀리서 그가 피하려던 마리네뜨가 달려왔다. 두터운 치맛자락이 펄럭거려 주변에 바람이 일도록 마리네뜨는 힘차게 달려왔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못들은 척 하려던 아드리앙은 그녀가 무시하기에 너무 가까워지자 억지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의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난 마리네뜨는 뺨이 붉었다. 그것이 뛰느라 상기된 것인지, 아드리앙을 만나서 반가워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마리네뜨는 숨을 세차게 쉬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리네뜨의 격한 환대에 아드리앙의 마음이 콕콕 찔리는 것을 그녀가 알 리는 없었다.

방금 들었던 아버지의 폭언과 자신의 감정의 불투명한 앞날이 떠올라 아드리앙은 몰래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답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힘이 있었다. 밝고, 자유롭고, 강인하다. 그의 인어공주는 언제나 아드리앙을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댈 수 있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길지도 않은 손톱이 살에 아프도록 묻힐 만큼 아드리앙은 주먹을 쥐었다.

 

그 때, 마리네뜨가 꽉 쥔 그의 손을 잡았다.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그녀는 아드리앙의 손을 잡아 펼치고, 손톱자국이 남은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고 꼭 붙잡아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왕궁의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깨울 것처럼 시끄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놓고선, 그녀는 아드리앙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드리앙,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말과 동시에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잡힌 손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이끌려갔다. 손바닥에 괴롭게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화끈거렸지만, 이내 부드러운 손에 닿아 아픔이 여물었다. 아드리앙은 괜히 드는 죄책감에 눈만 내리깔고 걸었다.

 

***

 

짜잔! 마리네뜨가 무거운 문을 열며 외쳤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아드리앙의 눈도 커졌다. 왕궁 안의 방이 많다고 하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방은 한쪽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으며 물이 가득 차 있어 꼭 수족관 같았다. 다만 유리가 천장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었고, 사다리가 걸쳐 있어 물속에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방안 가득히 물의 푸른 일렁임이 반사되어 꼭 바다 속에 서 있는 느낌도 들었다.

 

아드리앙의 감탄하며 방을 잠시 둘러보는 사이, 마리네뜨는 그 사다리를 타고 잽싸게 올라갔다.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진짜 들어갈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물에 감겨 아드리앙은 손을 뻗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그녀가 반인반어, 인어라는 것도 잊고 그녀를 구하러 들어갈 뻔 했다.

 

다행히도 아드리앙이 사다리를 타기 전에 마리네뜨가 자신은 멀쩡하다는 듯이 물속에서 유리창을 똑똑 두들겼다. 물에 젖으면 하반신이 물고기가 되는 특성상 그녀의 다리는 인어의 지느러미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물속에서 그녀의 옷자락, 머리카락, 지느러미가 가볍게 너울거렸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모양새를 하고 그녀는 아드리앙을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것 봐, 아드리앙. 내 지느러미, 무늬가 선명해졌지.

 

마리네뜨가 입을 벙긋거렸다. 물속에서 진동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더니, 그것이 선명해지는 지느러미의 무늬였구나. 아드리앙은 그녀의 말대로 눈을 굴려 그녀의 지느러미를 살폈다. 지느러미의 무늬는 인어들마다 달랐고, 마리네뜨는 붉은 색에 검은 원이 박힌 무당벌레 무늬의 지느러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네뜨가 말한 대로 그 색깔은 고운 붉은 빛을 띠었다.

 

선명해지는 지느러미의 빛깔. 왕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누구보다 많은 배움을 강요받은 아드리앙은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지느러미 빛깔이 선명해질수록 그녀가 언령을 사용할 수 있는, 즉 죽어야 할 날이 가까워온다. 아드리앙은 손을 뻗어 유리창에 가만히 얹었다. 그 위로 마리네뜨도 제 손을 겹쳤다.

 

멀지 않은 마리네뜨의 죽음과 그녀를 이용하라는 아버지의 말만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는 마리네뜨를 이용해야 했다. 오직 왕국을 위해서. 마리네뜨에게 거짓 사랑을 속삭이며 그 목숨을 빼앗아 온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은 그만큼의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왕국의 정점에 서야 할 아드리앙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잔인했다. 눈앞의 소녀는 갇힌 수명도 넓은 바다도 모르고 겨우 한 칸 방의 물속에서 죽을 지느러미를 그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아드리앙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의 눈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마주하고 있던 마리네뜨가 손을 들어 창을 두들겼다. 움직임과 둔탁한 소리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생각을 걷어낸 아드리앙은 앞의 마리네뜨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마리네뜨는 창 너머로 그의 눈가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무엇인가를 닦아내는 것 같은 손짓에 아드리앙은 반사적으로 눈가를 쓸었다.

 

-왜 울어.

 

짧은 입술의 달싹임이 의미를 전했다. 아드리앙은 손끝에 묻어난 짠 기가 도는 액체가 자신의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서 마리네뜨는 몇 방울 채 되지도 않아 금세 말라버린 눈물을 닦아주려고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마리네뜨를 가만히 보았다. 슬픔은 마리네뜨를 감싸고 있는 수조의 바닷물만큼이나 넘치고, 그녀의 바다는 흘린 눈물만큼 작았다. 이미 그 작은 등에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그녀는 아드리앙의 감정마저 지려 들었다. 겨우 열댓 살의 이 소녀는 어디까지 영웅 같을 셈인가. 아드리앙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웃음으로 눈가가 접히며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굴렀다.

그의 웃음과 동시에 유리창 너머를 열심히 닦던 손길이 멈추었다. 대신 그녀의 지느러미가 부드럽게 움직여 물살을 갈랐다.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인지 그녀는 멀지 않은 사다리까지 천천히 헤엄쳤다. 그리고 나가기 전, 마리네뜨는 물속에서 한동안 그를 마주보았다. 아드리앙도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쫓았다. 푸른 물속에서 그보다 더 푸른 머리칼이 물결에 따라 너울거리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아드리앙은 다시 나오는 눈물을 몰래 훔쳤다.

 

물살을 가르고 나온 마리네뜨가 사다리에 발을 얹으려다 멈칫했다. 인간의 다리일 때만큼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지느러미가 발 대신 덩그러니 있었다. 아드리앙은 곤란한 모양이 된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웃음과 손길로 허락을 구하고 아드리앙은 마리네뜨를 안아들고 구석의 의자에 내려주었다. 그녀가 잔뜩 머금은 물기가 아드리앙에게도 스며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물기보다도 곤란한 게 있다면 닿아 있는 소녀의 몸이 말랑하고 따뜻했다는 것 정도일까.

 

자리에 함께 앉아 마리네뜨의 지느러미에서 물기가 말라 다리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엇갈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마리네뜨, 열여섯 살이 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내가 죽는단 거잖아.”

“죽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태평해.”

“그게 왜? 나는 원래 열여섯에 죽는 거잖아. 그보다 왜 울었어, 아드리앙.”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아름다워서.”

 

아드리앙은 아까 새겼던 인어 모습의 마리네뜨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가 마리네뜨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아예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한 말은 사심 없이 그저 순수하게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한 말이었고, 마리네뜨가 거기에 낚였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귀 끝까지 빨개진 채 얼굴을 숨기려 들었다. 그녀의 반응을 본 아드리앙은 의도치 않게 뱉어 버린 말이 괜히 쑥스러워져서 같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리네뜨의 지느러미가 전부 말라 걸어갈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천천히 일어났다. 방금 전에 분위기가 묘해진 탓에 방을 나서면서도 어색한 공기는 흩어질 기미가 없었다. 주고받는 말 한 마디 없이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앞서기도, 뒤처지기도 하며 걸었다.

 

-아해.

 

아드리앙은 그녀를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할수록 더 신경이 쓰여, 결국은 곁눈질로 그녀를 흘금흘금 쳐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의 쪽을 하나도 보지 않고 있는 마리네뜨에 조금은 마음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 찰나, 마리네뜨의 입술이 뾰족 내밀어졌다. 특이한 입술의 움직임에 아드리앙이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소리도 없이 터져 나온 것은 익을 대로 익어버린 감정이었다.

 

-아드리앙, 좋아해.

 

눈으로 읽어낸 입모양이었지만 한껏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나 몸짓 등에서 마리네뜨가 몰래 고백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여전히 행동을 숨길 줄을 몰랐다.

몰래 말한 것으로 그녀가 답을 듣고 싶어서 한 짓은 아니라는 것을 아드리앙은 알았다. 하지만 그의 속에서는 이미 답을 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가 마리네뜨라면, 어떤 선택지도 긍정의 답이 떴다. 아드리앙은 마리네뜨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이 이야기를 해 주면 그녀는 분명 뛸 듯이 좋아할 것이다. 높게 뛰어올라서 그에게 안겨 올지도 모른다.

 

행복하게 웃던 아드리앙은 이내 미소를 거뒀다. 답이 정해진 것과 그것을 말해주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특히나 그에게는. 아드리앙의 눈에 그의 아버지가 있는 왕좌가 스쳤다. 여기서 자신도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마리네뜨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왕국에도 좋은 일이 되겠지.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그녀를 사랑하면 전부 끝나는 일이고, 이미 그의 안에서는 끝을 고하는데.

 

그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은 마리네뜨도 기뻐하고, 그의 진심이기도 했으며,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었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였다. 하지만 아드리앙이 망설이는 부분은 맨 마지막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랑, 감정마저도 왕국을 위해서 바치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말하기 전부터도 그는 마리네뜨에게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가 같아져서야 자신도 마리네뜨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 아드리앙이 품은 것은 마리네뜨를 통제할 수단으로나 사용할 정도의 싸구려 감정이 아니었다.

 

결국 마리네뜨의 소리 없이 닿은 고백에 답하지 못한 채로, 아드리앙은 가슴께의 옷자락만 꾹 쥐었다. 단지 그녀를 사랑해서 끝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도, 나의 감정-.

 

아드리앙은 걸음을 늦춰 앞서가는 마리네뜨의 다리를 응시했다. 붉고 검은 무늬의 지느러미는 매우 아름답지만, 그걸 버리면 안 될까. 네가 인어공주가 아닌 평범한 소녀였다면.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아드리앙은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거의 마른 옷에서 물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열여섯이 되는 그날까지 곤란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용하라는 뒷말이 있기는 했어도 그의 아버지, 왕으로부터도 나름의 인정을 받았다. 그것은 동시에 마리네뜨와 관련된 일이라면, 또는 그녀가 원한다면 아드리앙의 시간이 훨씬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했다. 때문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평탄해야 했을 앞날을 깨부술 소녀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왕궁에 들어와 아드리앙을 안고 입부터 맞추려 드는 충격적인 첫 만남을 선사한 그녀는 클로이 부르주아, 이웃 나라의 공주이자 아드리앙의 약혼녀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만난 후부터 클로이와 마리네뜨는 매일같이 으르렁대기에 바빴다. 그들은 아드리앙을 사이에 둔 연적이라는 것 외에도 서로에게서 싫어할 요소를 한순간에도 몇 개는 집어냈다.

그녀들의 대립 구조에는 그 직접적인 원인인 아드리앙 외에 왕국에서도 크게 곤란함을 겪었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 덕분에 얌전해졌고, 조금만 기다리면 왕국에서 바라는 결말은 나온다. 그런데 클로이의 등장으로 그녀가 전처럼 난동을 부리거나 언령으로 이상한 것을 말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다고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의 비위만 맞춰 주느냐 하면 그것 역시 난처했다. 클로이와의 약혼은 마리네뜨가 돌발 행동을 할 때를 대비해 이웃 나라와 혼약 관계로 맺은 동맹의 증거였다. 결국 왕국에서는 두 소녀의 가시가 삐쭉삐쭉 서는 것을 보며 중간에서 중재를 하느라 바빴다. 중재라고 해봤자 제멋대로인 두 사람의 싸움은 좀처럼 말릴 수 없었으므로 왕궁 안의 사람들은 둘을 최대한 만나지 않게 하거나, 마리네뜨는 얼마 후면 죽을 거라는 타이틀로 클로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공식적으로 약혼녀의 위치에 있는 클로이의 등장은 마리네뜨에게도 많은 심경의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아드리앙과 함께 있는 것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클로이가 쫓아와 훼방을 놓고, 아드리앙은 자기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드리앙은 그 때마다 클로이를 달래 보내 놓고 마리네뜨의 기분을 풀어주려 필사적이었다.

 

클로이가 나타나기 전에 마리네뜨는 아드리앙과 함께 있고, 그가 자신만을 보고, 웃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것은 마리네뜨는 아드리앙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구구절절한 말보다도 행동, 눈빛에서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클로이의 등장과 동시에 확신했던 그의 애정이 거짓인 것만 같았다.

 

결국 어느 날 밤, 마리네뜨는 무너지는 속을 안고 아드리앙의 방에 잠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사라진 별궁에서는 다시 난리가 났겠지만 마리네뜨 나름대로도 시녀들, 특히 알리야를 생각해 지금까지 탈출하지 않고 참았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이미 혼자 앓느라 잠에 들지 못한 밤을 몇 번이나 보내왔다. 게다가 오늘 아드리앙이 널 좋아하는 게 맞긴 맞냐는 비아냥거림을 클로이에게 들은 후로 화가 나고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리네뜨는 몰래 빠져나와 아드리앙이 있는 곳에 숨어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이 당연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드리앙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었다. 기왕이면 자신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패기 있게 왕자의 방에 숨어들기까지 했으면서, 보고 싶어서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려왔던 아드리앙이 눈앞에 있는 것을 느끼자 마리네뜨의 눈에서는 퐁퐁 눈물이 솟았다.

착잡한 것은 아드리앙도 마찬가지였다.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을 그렸던 것처럼 아드리앙 역시 그녀를 꼭 닮은 밤하늘에서 마리네뜨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그녀는 갑자기 등장했다. 아드리앙은 갑자기 들어온 마리네뜨에 한 번 놀라고,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잔뜩 젖어 있어서 다시 놀랐다. 그는 당황해서 눈물을 쏟아내는 마리네뜨의 몸을 껴안아 등을 도닥였다.

 

“마리네뜨,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그보다 왜...”

 

왜 울고 있어.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는 말은 아드리앙의 입에서 다 나오지 못했다. 마리네뜨는 그의 뒷목을 잡아 내리고 발뒤꿈치를 한껏 들었다. 눈물에 젖어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 금세 떨어졌다. 아드리앙에게 갑자기 입을 맞춘 그녀는 입맞춤만큼이나 갑작스러운 고백으로 서럽게 입을 뗐다.

 

“아드리앙,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아니, 나를 좋아해 줘.”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마리네뜨의 눈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눈뿐만 아니었다. 손도, 입술도, 아드리앙 앞에서 마리네뜨는 떨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결론을 냈으면서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에게 직접적인 말을 해 준 적은 없었다. 말하는 순간부터 마리네뜨를 대하는 자신이 거짓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마리네뜨가 이렇게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아드리앙? 마리네뜨가 대답을 강요하며 울먹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턱 끝까지 가서 진주가 되어 떨어졌다. 마리네뜨의 감정이 창밖의 별가루처럼 아드리앙의 공간에 흩어졌다.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눈가를 훔치고 그녀를 자신의 어깨로 당겨 안았다. 그는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는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마리네뜨, 만약...내 고백이 진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듣고 싶어?”

 

마리네뜨의 귓가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꼭 우는 것처럼 들렸다. 아드리앙은 눈물이 차지 않는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질문이 마리네뜨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이용하는 거면 어떻게 해. 너는, 그리고 나는.

 

그 때 아드리앙은 몸에서 압박을 느꼈다. 얌전히 안겨 있던 마리네뜨가 그의 몸에 두른 두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마리네뜨에게서 고운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

 

“너는 그럴 사람이 아냐, 아드리앙. 만약 날 이용하려고 했다면 진작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거야.”

 

마리네뜨는 아드리앙 자신보다도 더욱 그를 믿고 있었다. 마주한 마리네뜨의 눈빛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확고함이 느껴졌다.

바닷물보다 깊은 머리칼, 맑은 물빛 눈동자, 고운 산호초 같은 입술. 바다 같은 소녀는 몰아치며 그의 근심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파도가 치고 난 후의 고운 모래밭처럼. 아드리앙은 속으로 누구보다 바랐을 고백을 이제야 말했다.

 

“마리네뜨,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마리네뜨가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괴롭고 행복하게 입을 맞췄다. 그동안 속을 끓였던 만큼 갈구하는 손길이 애타게 이어졌다. 동이 틀 때까지 평생분의 키스를 다 하려는 것처럼,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떨어지지 않았다. 입이 잠깐 떨어질 때마다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말했다. 지금만큼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게 안타까운 때가 없었어.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픔은 바닷물만큼이나 넘쳤고, 그녀의 바다는 눈물만큼 작았다. 그리고 새로이 마리네뜨에 대한 애정과 정해진 앞날의 안타까움은 밤하늘과 그의 방바닥을 수놓았다.

마리네뜨가 열여섯 생일을 맞기까지 딱 일주일 전의 밤이었다.

 

***

 

시계의 바늘은 잔인하게 달렸다. 어느덧 마리네뜨가 열여섯 생일을 맞기까지 딱 사흘 전이 되었다. 그동안 마리네뜨는 매일같이 못다한 일을 전부 하려는 것처럼 분주했고 아드리앙은 그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클로이의 방해는 여전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견고해진 탓에 더 이상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문제는 흐르는 시간을 멈출 방법이 없다는 것 하나였다.

 

오늘도 아드리앙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지친 마리네뜨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나무 밑에서 비몽사몽한 몸을 눕혔다.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옆에 앉아 함께 바람을 맞았다. 그녀를 지나쳐 오는 바람에는 마리네뜨의 숨결마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잔잔한 평화에 취해 있던 아드리앙은 마리네뜨를 내려다보았다. 언령의 힘이 없으면 지금처럼 평화로울 수 없을까. 적어도 그녀가 없어진다면 아드리앙은 평화롭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그 때, 혼자 고찰하던 아드리앙의 시선 끝에 누군가가 걸렸다. 피부색과 머리카락의 색이 어두운 그녀는 아드리앙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드리앙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건이 있는 듯 눈을 피하지 않고 있는 소녀는 마리네뜨의 전속 시녀, 알리야였다. 단 잠에 빠져든 마리네뜨를 한 번 내려다보고, 아드리앙은 몸을 일으켜 알리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알리야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장소를 원했다. 그녀는 아드리앙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길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꽤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발을 멈췄고, 아주 잠깐 우물쭈물하던 알리야는 가벼운 인사 후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밤마다 인어공주에 대한 왕실의 금서를 포함한 모든 기록을 몰래 살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이 지나고도 마리네뜨 아가씨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족, 그것도 다음 왕이 될 아드리앙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알리야가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녀로서 뼈가 굵은 그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알리야는 그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담담하게 펼쳐나갔다. 아드리앙은 미동도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알리야의 말에 따르면 마리네뜨가 목숨을 잃는 것은 그녀의 언령의 대가가 수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어공주의 언령은 열여섯이 되었을 때부터 하는 모든 말에 적용된다. 하지만 열두 시의 종이 울리고 가벼운 바람을 말한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깎이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거나 규모가 큰 것일수록 대가가 커져, 마침내 목숨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인어공주들이 죽어야 했던 것도 왕국의 장기간의 평화라는 큰 것을 바랐기 때문에 생을 전부 바쳐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열여섯이 된 마리네뜨가 앞으로 남은 평생을 말하지 않고 산다면 그녀는 수명이 깎일 필요도, 죽을 필요도 없었다. 거기까지 말한 알리야는 고개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그저 시녀와 모셔야 할 주인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마리네뜨를 상당히 아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등하지 못한 관계 같지만 알리야와 마리네뜨는 서로에게 있어 친한 친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몰래 행한 일 전부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아드리앙에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탁마저 했다.

 

“제가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알지만, 왕자님. 아가씨를, 마리네뜨를 데리고 도망쳐 주세요. 그녀가 평생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살 수 있도록. 마리네뜨에게 미래를 만들어 주세요.”

 

결론을 듣기까지 아드리앙은 새로운 생각으로 복잡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그녀가 살기를 바랐다. 마리네뜨가 자신의 곁에서 함께하는 미래를 원했다. 그리고 마리네뜨를 끔찍이 아끼는 시녀가 그 목숨을 걸고 알아낸 방법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마리네뜨는 앞으로 백 년간의 왕국의 평화를 위한 중요한 존재지만 희생당해야 했다. 아드리앙 자신도 왕국의 왕이 될 유일한 왕자이지만 자신의 인생이 없이 살아온 데다 약혼녀까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졌다. 그것도 상대는 왕국에 도움을 줄 만한 이웃 나라의 공주. 두 사람이 없으면 왕국은 더 이상 기록할 역사가 없게 될지도 모른다. 겨우 방법을 알아냈지만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아직 모른다. 아니, 정답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그저 희생자를 정해야 할 선택. 그는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해 고개를 땅만 쳐다봤다.

 

알리야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 아드리앙은 자신을 보고 잔뜩 신나서 달려와 안기는 마리네뜨를 마지막인 것처럼 꼭 안아주었다. 마리네뜨는 그의 속도 모르고 아드리앙이 꽉 안아주는 것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마리네뜨,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해?

 

***

 

아드리앙이 갈등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마리네뜨의 생일 하루 전날이 되었다. 이제 주변에서는 마리네뜨가 껌딱지처럼 아드리앙의 곁에 붙어있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다. 붙어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희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알리야와 아드리앙 외에 단 한명도 없었다.

 

아드리앙은 이 날이 되기까지 매일같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했다. 마리네뜨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았지만, 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너무 무거웠다. 선택하지 못한 채로 있는다면 마리네뜨를 잃어서, 고착 상태인 지금도 괴로웠다.

 

마리네뜨의 앞에서는 고민하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전부 들켜 버렸는지 그가 알리야를 만나고 온 후부터 마리네뜨는 눈에 띄도록 더 밝게 행동했다. 아드리앙은 저녁 식사 후 아기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리네뜨의 뒤를 따라가며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아드리앙의 눈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무리가 보였다. 한 무리의 사용인들은 모두 손에 가득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전부 호화스러운 식재료나 사치품 따위였다. 인사 후 아드리앙을 스쳐가는 사용인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십 년이 조금 넘는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던 공백기를 거쳐, 내일이면 다시 백 년의 평화가. 멀어져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아드리앙이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아드리앙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마리네뜨가 사라지는 일은 기쁜 일이다. 네가 희생해 지킬 곳은 고작 이런 곳이야, 마리네뜨. 아드리앙은 왕국에 경멸을 느꼈다.

 

이미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시각, 아드리앙은 겨우 마음을 굳혔다. 왕국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되어져 왔던 인어공주, 딱 한 번만 너를 위한 선택을 하자.

아드리앙은 달려와 품에 폭 안기는 마리네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듣는 마리네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마리네뜨.”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단순히 애정행각을 한다고 생각하도록 아드리앙은 마리네뜨를 꼭 껴안은 채로 그녀의 귓가에 알리야가 알아낸 것을 전했다. 마리네뜨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아드리앙처럼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이야기가 끝난 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마리네뜨가 살고 싶어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드리앙은 그녀가 새로운 선택에 직면한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리네뜨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괜찮아, 마리네뜨. 내가 같이 갈 테니까. 네 곁에 계속 함께 있을게.”

“그런 게 아니야, 아드리앙.”

 

그녀에게서 나온 말에 아드리앙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마리네뜨를 내려다보았다. 마리네뜨는 그를 향해 염려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정확하게는, 그녀는 아드리앙을 걱정하는 얼굴을 보였다.

아아. 아드리앙은 탄식했다. 눈앞의 작은 소녀는 어디까지 그를 위해 줄 셈인지. 이용당할 운명임에도 자신보다도 아드리앙이 버리게 되는 지위와 가족, 왕국을 걱정하는 모습에 아드리앙은 마음이 아팠다. 그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밝아오는 달빛이 내려앉은 마리네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떤 것보다도, 내게는 네가 더 소중해 마리네뜨.”

 

***

 

사람들이 통행이 줄어드는 깊은 밤, 마리네뜨와 아드리앙은 방을 몰래 빠져나왔다. 멀리 도망쳐야 하기 때문에 이동 수단이 필요했지만 마리네뜨가 우연히 가지고 나온 마구간의 열쇠로 해결되었다. 그녀가 마침 마구간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아드리앙은 크게 묻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조금 발갛게 부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인 전속 시녀가 개입했을 거라고 속으로 짐작했다.

 

마리네뜨가 말을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아드리앙은 그녀와 함께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성의 문지기가 교대하는 시간을 이용해 교묘하게 주의를 돌려 무사히 성을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왕궁을 함께 벗어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임에도 둘 사이에 긴장은 흐르지 않았다. 말이 빠르게 달렸고,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꼭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아. 위험한 상황인데도 마리네뜨는 우스워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에 아드리앙은 말을 달리며 마리네뜨에게 부끄러우니 그만 웃으라고 핀잔을 줬다. 말과 다르게 달빛이 내려앉는 해사한 얼굴에 아드리앙도 웃어 버렸지만.

 

 

당연한 일이겠지만, 중요한 두 사람이 왕궁에 없으니 들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사라진 두 사람이 밝혀진 시각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들키게 된 것은 마리네뜨의 부재가 아니라 아드리앙의 부재가 계기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마리네뜨에 대한 경계가 엄중했지만 그녀의 전속 시녀인 알리야가 함께 있다고 말했던 터라 마리네뜨는 별 의심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이가 아드리앙의 방에 방문하여 그가 없는 것을 발견했고, 아드리앙이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자 그와 항상 꼭 붙어 있는 마리네뜨의 방에까지 사용인들이 들이닥치게 되었다.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아드리앙의 아버지이자 현왕,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는 크게 노했다. 평소 차가운 모습만 보이던 가브리엘은 소리를 높여 나라 안을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멀리 가지는 못했겠지. 내가 인어공주 따위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왕국을 위한 일이던, 아들에 대한 과보호였던 심할 정도로 아드리앙의 행동에 간섭하던 가브리엘이었기 때문에 이번 아드리앙의 행동이 더욱 언짢았다.

 

그들을 잡는다면 인어공주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고, 왕자에게는 벌을 내릴 것이다. 순순히 돌아온다면 죽는 순간을 함께 하는 것 정도야 허락해 주겠지만. 하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인어공주는 그 자리에서 죽일 것이다. 괜히 조심스럽게 다룬다고 놓쳐서 다른 나라에 그녀를 보내거나, 보복으로 이상한 언령을 사용하게 하는 것보다야 죽이는 것이 낫겠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브리엘은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이동 경로의 길목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

아드리앙은 뒤집어쓴 후드를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뒤에 있는 마리네뜨의 후드도 마찬가지로 매만져 주었다. 병사들과 대치하고 나서 그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생각은 당혹감이나 앞으로의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드리앙도 마리네뜨도 침착했다. 꼭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멀리 못 갈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드리앙의 시선이 닿는 곳에 움직이기 조금 편할 뿐인 평상복과 후드뿐인 가벼운 차림이 닿았다.

 

병사들 쪽에서 왕의 전언을 전했다. 순순히 돌아온다면 가벼운 벌로 끝나겠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폭력 사용도 허가한다.

아드리앙은 아버지의 말을 전부 전하고 다소 위협적인 태도로 돌아선 병사들을 응시했다. 그들이 전한 왕의 말에 듣는 이는 자신밖에 없었다. 마리네뜨는 어떻게 해도 죽는다는 거겠지. 아드리앙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마리네뜨의 손을 한 번 꽉 쥐고는 놓았다. 그는 이를 물고 고삐를 쥐었다.

 

보란 듯이 뒤돌아 말을 달리는 그들에게, 병사들은 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저항할 경우에는 거친 행위도 허가. 병사들의 활 끝이 앞서가는 두 사람을 태운 말로 향했다.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말이 넘어지자 화살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후드를 뒤집어 쓴 인어공주의 치맛자락이었다.

 

“안 돼!”

 

다음 순간, 소녀의 찢어지는 비명이 밤하늘에 녹았다. 후드를 깊게 쓴 왕자는 무릎을 꿇고 다가가 처참할 정도로 화살이 박힌 인어공주를 부축했다. 가벼운 소재가 여러 겹 겹친 풍성한 치맛자락에 피가 스몄다. 왕자가 높은 소리로 쓰러진 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땅에 늘어져 있는 두 사람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가운데를 갈라 길을 텄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한 왕이 말에 탄 채로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왕은 다친 사람에 대한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왕자에게 집으로 갈 것을 독촉했다.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이웃 나라의 공주라도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왕자의 머리끝에 꽂혔다.

 

그 때, 인어공주의 후드 너머로 비치는 금발머리를 본 왕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인어공주의 후드 너머를 확인했고, 인어공주의 옷을 입고 있던 이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왕 대신 인어공주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던 왕자가 몸을 꿈틀 움직여 그의 얼굴을 가리던 후드가 벗겨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의 병사들은 모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은 조용해지고, 마리네뜨가 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밤하늘에 흩뿌려졌다. 마리네뜨는 화살이 잔뜩 박힌 아드리앙의 등에 손도 대지 못하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왕자의 몸짓에 벗겨진 후드 속에서는 바닷물 같은 머리칼과 물빛 눈동자, 산호초 같은 입술을 가진 인어공주가 나왔다.

아드리앙이 옷을 바꿔 입자고 했을 때. 마리네뜨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옷을 바꿔 입자고 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드리앙이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 우스워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서 아드리앙의 냄새가 나서 행복했다.

아드리앙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옷을 바꿔 입자고 한 걸까. 만약 나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는 절대 옷을 바꿔 입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둘 다 왕자인 척을 하거나, 인어공주인 척을 해서 같은 위험을 짊어졌을 텐데. 아니, 이런 비극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옷을 바꿔 입기 이전에 도망을 치지 않았을 텐데. 얌전히 너의 행복을 빌어줄걸.

 

어느덧 그들의 주변에는 마리네뜨가 흘린 눈물이 진주가 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드리앙은 겨우 손을 들어 제게 얼굴을 묻고 우는 마리네뜨를 달랬다. 마리네뜨, 울지마. 힘들게 연 입에서는 이제 그녀를 위한 말이 나오는 것도 힘들었다. 그의 의도와 말의 뜻을 배신하고 나오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마리네뜨에게서 눈물만 더 뽑아냈다.

 

애타게 이름만 부르던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예전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에게 고백할 때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 공주님, 울지 말고 키스해줘. 아드리앙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던 마리네뜨는 그의 말대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차가워지는 손끝을 꼭 잡고서 마리네뜨는 그의 끝을 예감했다. 끝까지 눈물을 멈추지는 못한 채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인어공주가 아니었더라면, 네가 왕국의 하나뿐인 왕자가 아니었다면. 만약 우리가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면-

 

멀리 성이 있는 곳에서 열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원래는 밤에 울리지 않지만 오늘은 마리네뜨의 생일이어서 울리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녀가 언령을 사용할 수 있는 날이자 원래는 왕국을 위해 희생했어야 할 날이다. 이런 날 울리는 저 종은 그녀의 죽음을 위해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의 왕국을 위해 울리는 것일까.

 

마리네뜨는 생각 대신 눈앞의 아드리앙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녀의 턱 끝에서는 눈물이 진주로 변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령을 사용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한 번의, 절대적인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수명을 전부 사용한다면 아마 죽어가는 아드리앙을 살리는 것쯤은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도록 비는 것은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왕국의 평화나 비는 것보다 못했다. 마리네뜨는 속으로 열심히 아드리앙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드리앙, 나는 너와 사랑을 하고 싶어. 다시 한 번 빗속에서 반하고, 함께 쿠키도 먹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싶어. 몰래 너를 바라보거나 가는 길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네 모습으로 가득 찬 방에서 잠에 들고 싶어. 짝사랑에 속도 끓여 보고, 둘만의 특별한 비밀도 갖는, 그런 날들이 다시 왔으면 좋겠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안 될까. 우리의 앞날에, 안 된다면 먼 미래에라도-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손을 꼭 잡고 눈물로 젖어있는 얼굴에 꼭 가져다 댔다. 아드리앙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마리네뜨는 그와 손을 맞잡고 입을 뗐다.

늘 다른 사람의 바람을 빌었던 다른 인어공주들과는 달리, 그녀는 오직 자신의 욕심과 의지로 언령을 사용했다. 수명을 깎을만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비는 일은 첫 인어공주 다음으로 그녀가 유일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멀리서 바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던 그 동안의 인어공주들이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리네뜨는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소원을 간절히 빌었다.

 

 

“몇 백 년, 몇 천 년을 기다려도 좋으니, 다음 생에 나와 다시 만나 주세요.”

 

 

-사랑하는 아드리앙, 분명 그 때가 되어도 당신에게 나는 특별하고, 내게 당신은 특별하겠지.

 

 

 

 

 

 

 

 

 

 

 

 

 

 

 

 

 

 

 

 

 

 

 

 

 

 

 

 

 

 

 

 

 

 

 

 

 

 

 

 

 

 

 

 

 

 

 

 

 

 

 

 

 

 

 

 

 

 

 

 

 

 

이런 걸 말의 힘이라고 하는 걸까. 마리네뜨는 자신의 말이 굉장히 울리는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물거품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금 사용한 언령으로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선연한데도 마리네뜨는 만족한 미소를 띠고 눈을 감았다.

 

아드리앙은 꼭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존재가 눈앞에서 가벼워지고 있었다. 아드리앙은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쥐어짜 사라지는 마리네뜨를 잡은 손에 집중시켰다. 그것을 느낀 마리네뜨가 고른 치아가 보이도록 입을 벌려 예쁘게 웃었다. 아드리앙은 그녀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지기 전, 희미하게 대답했다.

 

“그래, 꼭 만나. 약속할게.”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을 완전히 감았다. 때문에 그녀가 대답을 들었는지 아드리앙이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아드리앙이 대답함으로 인해서 그녀의 언령이, 그들의 약속이 완성된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 아드리앙은 미소와 함께 눈꺼풀을 영원히 닫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세상에서 떠나고 난 후, 그들이 눈을 감은 자리에는 한 사람의 시체와 작은 보석함이 남았다.

 

그리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물거품에서 나온 소녀들이 해안가로 떠밀려 오는 일은 없었다. 왕국에서는 마지막 인어공주인 그녀가 사라지고 남은 보석함을 가져가 조사했고, 그 안에 있는 보석들이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어공주와 왕자가 사라진 탓에 왕국에 위기가 닥칠 거라고 모두가 불안에 떨었다. 또 그만큼 앞날이 불투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남긴 보석함의 신비한 힘으로 왕국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인어공주와 언령의 힘 없이도 왕국이 안정될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인어공주가 남겼던 보석을 바다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인어공주가 남긴 기적을 일으키는 그 보석을 이렇게 불렀다. 미라큘러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프랑스의 파리, 마지 만화 같은 악당의 출현은 그에 대치할 히어로들도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서로에게 특별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채로 만나게 된다. 가면에 정체를 숨기고, 혹은 클래스메이트로.

 

몇 백, 몇 천 년을 넘어서- 인어공주의 언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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