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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요네코

 "아이 참, 어딜 갔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시계 토끼를 찾아 눈을 가늘게 뜨고 풀숲 사이를 살피던 앨리스는 제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거기, 누구예요?"

 

앨리스가 소리쳐 부르자 어디선가 본 듯한 검은 고양이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꼭 에메랄드처럼 청명한 녹색 눈동자에, 태양빛 금발을 가진 고양이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의 얼굴은 새까만 가면으로 가리워져 있었고, 목에 달린 방울은 나뭇가지 위를 조용하고 민첩하게 기어가는 소년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습니다. 입가에는 어딘지 친숙한 미소가 걸려 있습니다.

 

"반가워, 마...앨리스. 난 체셔 고양이야. 이 숲에 살고 있지. 원더랜드 주민이 아닌 사람은 처음 봐서, 깜짝 놀랐는걸."

 

회중시계를 가진 토끼를 보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들은 체셔 고양이는 눈썹을 모으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습니다.

 

"이런, 공주님, 안타깝게도 난 그런 토끼는 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를 쫓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야."'

"어째서요?? 난 꼭 그 토끼를 찾아야만 한다구요."

"...굳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회중시계를 가진 토끼는 원더랜드의 여왕을 위해 일하는 가장 충직한 신하야. 그리고 그 여왕은 사형이 취미고. 아마 낯선 방문객을 보면 당장 공주님의 머리를 자기 방에 그림마냥 걸고 싶어할 걸."

 

고양이 소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짐짓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습니다.

 

"세상에, 자기 나라 백성들 머리를 잘라서 전시를 한다고요?!"

"맞아. 벌써 컬렉션이 박물관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을 걸? 그러니 공주님은 나와 함께 이 변두리 숲에서 차나 한잔하고 돌아가는 게…"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체셔 고양이 씨, 그런 여왕을 그냥 가만히 놔두려고요? 여기 숨어 있어도 언젠가는 여왕의 컬렉션이 되고 말 걸요. 왜 다같이 힘을 합쳐서 여왕을 어딘가에 가둔다거나 하려고 하지 않는 거죠?"

 

체셔 고양이는 놀란 듯이 잠시 눈을 크게 뜨다, 곧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참 용감하구나, 공주님. 하지만 여왕은 아주 강해. 벌써 우리들 중 용감한 이들이 무리를 지어 덤빈 적이 있지.  하지만 그들 모두가 여왕의 컬렉션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구. 그 때 대장으로 나섰던 녀석은 아마 1층 로비에서 손님 맞이하는 데 이력이 났을 거야. 아, 물론 머리만."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뼈가 있는 농담을 하는 체셔 고양이를 뒤로 하고, 굳은 입매를 한 앨리스는 숲 속으로 타박타박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덕분에 체셔 고양이는 말을 하다 말고 단정하게 묶인 그녀의 밤하늘 빛 머리카락을 따라 황급히 나뭇가지를 옮겨 타야만 했답니다.

 

"어디 가는 거야? 공주님."

"블랙캣이 절 도와 주든 아니든 전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갈 거에요."

 

갑자기 호칭이 바뀌자 체셔 고양이는 벼락을 맞은 듯 나뭇가지 위에 굳어버립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블랙캣'은자기가 뱉은 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숲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앨리스를 따라 날렵하게 나뭇잎들 속으로 몸을 감췄습니다.

 

"기다려, 공주님!"

 

 

 

 

 

"...정말 이 깊은 숲 속에 당신 친구가 산다구요?"

"그렇다니까. 고양이 좀 믿어봐, 공주님. 그 친구가 보기에는 좀 그래도 왕궁까지 가는 길에 대해선 빠삭하다구. 아, 다 왔나 본데."

"와…"

 

앨리스가 탄성을 내지른 이유는 갑자기 나타난 공터에 자리한 거대한 대리석 식탁 때문이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케이크며 타르트, 마쉬멜로, 마카롱, 크루아상 등등 온갖 간식이며 홍차 주전자와 찻잔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탁 끝에 자리한 화려한 의자 위에는-

 

"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군?"

"티 파티에 초대할 손님이 생겨서 기쁜데."

"음냐…"

"...이봐 킴. 손님이 왔잖아. 좀 일어나 봐."

 

커다랗고 화려한 모자를 쓴 모자 장수가 앉아 있었습니다. 모자 장수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은 푹신해 보이는 의자 위에서 잠든 덩치 큰 소년을 열심히 깨우려고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잘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에휴. 아, 미안해. 난 ‘미친 모자 장수’ 니노야. 여기는 ‘삼월 토끼’ 막스고. …저기 자고 있는 녀석은 ‘산쥐’ 킴이라고 해. 체셔 캣도 오랜만이지만 원더랜드 바깥에서 온 손님이라니 이거 놀라운걸.”

“아하하, 블랙캣도 같은 말을 하던데요. 음… 니노. 만나자마자 갑자기 미안하지만, 왕궁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왕궁? 그 끔찍한 여왕이 있는 곳엔 왜 가려고?”

“여왕이 더 이상 나쁜 짓을 못하게 하려고요.”

 

앨리스의 말을 들은 이들은 각자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모자 장수는 와장창 들고 있던 홍차 잔을 엎질렀고, 삼월 토끼는 크루아상 접시를 팔꿈치로 쳐서 온 잔디밭에 크루아상이 흩어지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내내 자고 있던 산쥐마저도 소스라쳐서 눈을 뜰 정도였습니다.

 

“앨리스!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한 계획이야. 괜히 갔다가 여왕에게 머리가 잘리느니 좀 외진 곳이더라도 여기서 파티나 즐기는 게 낫지. 봐, 마카롱이며 초콜릿이 여기저기 널렸다구. 여왕의 박물관 속 예쁜 전시품이 되는 것보단 훨씬 인생을 즐기기 좋은 방법이지. 애초에 넌 여왕의 전시품이 되기엔 너무 예쁘다구. 안 그래, 체셔 캣?”

 

부드럽게 말하며 슬그머니 앨리스에게 다가서려는 모자 장수를 블랙캣이 인상을 쓰며 저지했습니다. 의아해진 앨리스가 블랙캣을 쳐다보자 블랙캣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습니다.

 

“여하튼, 그건 안 좋은 계획이니, 여기서 다같이 파티나 즐기자고. 앨리스, 다즐링으로 줄까? 아니면 얼 그레이?”

“아니…저는….”

“마리…앨리스.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좋지 않아? 왕궁까진 머니까, 이대로 갔다간 왕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땡볕 아래 고양이처럼 지쳐 버릴 거라구.”

“뭐…그래요. 블랙캣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좋아~좋아~!! 파티다! 셋이 아니라 다섯이서 하는 티 파티라니! 이거 흥겨운걸! 친구, 저기 있는 쿠션을 나 대신 가져다 앨리스를 편안히 해 주지 않겠어? 고마워.”

 

앨리스는 처음에는 떨떠름했지만, 곧 모자 장수만큼이나 티 파티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홍차는 적당히 씁쓰레했고, 크루아상은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으며, 마카롱 필링은 달콤했습니다. 거기다 모자 장수는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미친 모자 장수 같지 않은데. 막스도 삼월 토끼처럼 정신 나가 보이진 않고…’

 

잠시 든 의문점은 모자 장수의 유쾌한 농담에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앨리스가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데 반해, 블랙캣은 묵묵히 홍차가 담긴 찻잔만 만지작대는 중이었습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그 와중에도 걱정이 된 앨리스는 슬쩍 블랙캣을 쳐다보았습니다. 착각인 걸까요. 반쯤 감긴 블랙캣의 눈이 어딘지 시무룩해 보입니다.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체념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블랙캣?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 아니야. 공주님. 난 괜찮아. 그보다… 니노가 좀 재미있는 친구지. 안 그래?”

“맞아요. 이렇게 재미있는 분이 어째서 미친 모자 장수라고 불리는 거죠? 아하하!”

“그건….솔직히 나도 잘 몰라. 어...재능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라?”

“오호라, 그렇군요.”

 

납득한 앨리스가 고개를 돌리고 모자 장수를 쳐다보는 틈을 타, 블랙캣은 어딘지 모르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너무 즐거워서 까먹을 뻔했어요. 모자 장수 님, 이제 슬슬 왕궁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아, 참 그랬지. 이렇게 매력적인 아가씨를 보내기는 참 아깝지만... ...그러니까, 어떻게 가더라? 그렇지. 여기를 빠져나가서 북쪽으로 한참 숲속 오솔길을 걸어가면 딱 호두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나오는데, 거기서 동쪽으로 꺾어서 가다 보면 곧 초원이 나오지. 초원을 가로질러서 가다 보면 다시 숲이 나오는데 거기 가면 지혜롭기로 소문난 쐐기벌레가 한 마리 살고 있어."

"오...그리고요?"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가 끝."

"네에?!?!?!"

"나머지는 그 쐐기벌레에게 물어봐. 왕궁에 간 지가 워낙 오래 되어서 기억이 제대로 나야 말이지."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여유롭게 차를 들이켜는 모자 장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멍하니 바라보던 앨리스는 고개를 홱 돌려 블랙캣을 노려봤습니다.

 

"아아--!! 블랙캣, 모자 장수가 왕궁까지 가는 길에 빠삭하다면서요!"

"....푸후."

"뭐에요, 왜 웃고 그래요?!"

"아니, 아니, 미안해 공주님. 아무것도 아니야. 어, 그러니까... 가는 길에 원더랜드 구경이나 하라고..? 으앗, 미안 공주님! 그렇지만 쐐기벌레를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원더랜드에서 제일 지혜롭다고 소문났으니까. 어쩌면 여왕을 이길 대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흐음....."

 

앨리스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블랙캣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마구 머리를 잘라대지만 무서운 나머지 아무도 항의조차 못하는 여왕을 고작 한 소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이길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될 만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모자 장수 님, 맛있는 음식이랑 차 정말 고마웠어요. 산쥐 씨랑 삼월 토끼 씨도 안녕.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잘 가 앨리스. 기쁜 소식이 들려오길 바랄게. 그 때가 되면 다시 한번 모두 함께 파티를 열자구, 친구."

"안녕, 앨리스."

"드르렁..."

"...넌 손님이 가는데 좀 일어나 봐라 킴."

"아하하..."

 

모자 장수 일행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앨리스와 블랙캣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모자 장수의 말대로, 북쪽으로 한참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호두와 딱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꺾어 초원을 가로질러...야 했습니다만, 초원으로 나가기도 전에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습니다. 결국 앨리스와 블랙캣은 그날 밤을 숲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블랙캣이 나뭇가지를 꺾어와 불을 피웠고,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했던 앨리스는 블랙캣의 무릎을 벤 채 금세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블랙캣의 손길을 꿈결처럼 느끼면서, 앨리스는 어렴풋한 의문을 떠올렸습니다.

 

'오늘 분명 처음 만났는데... 어째서 블랙캣이 이렇게 친근한 걸까...? 머리를 쓰다듬어도 전혀 싫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뭔가가 어렴풋이 보이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잠에 뭔가가 있었던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은 흰 토끼처럼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앨리스는 블랙캣의 옷 색깔처럼 새까만 잠에 조용히 빠져들었습니다.

 

 

 

 

 

"...어나. 일어나. 공주님."

 

앨리스는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졸음이 잔뜩 묻은 눈을 겨우 떴을 때 앨리스가 본 것은 이미 중천에 뜬 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태양과, 그 태양만큼이나 따뜻하게 웃고 있는 블랙캣이었습니다.

 

"으으음..."

 

블랙캣의 얼굴은 새까만 가면에 가려져 있는데, 어째서일까요. 앨리스는 한 순간 블랙캣이 태양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스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햇빛에 반짝거리는 블랙캣의 뺨을 천천히 쓸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몽롱하고 나른하던 앨리스의 기분은 당황한 듯 크게 떠진 블랙캣의 눈동자 때문에 비누거품처럼 펑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저..그러니까...공주님?"

 

앨리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블랙캣을 밀치고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자 어색한 얼굴을 한 블랙캣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으..아...그러니까 이건....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언니가 매일 깨워주니까... 버릇이 들어서요! 그런 것 뿐이에요.."

"...그렇구나. 잠 깼으면 그만 갈까, 공주님?"

 

블랙캣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해 앨리스는 놀랐습니다. 돌아보니 블랙캣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앨리스는 조심스럽게 블랙캣에게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블랙캣은 앨리스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고개를 든 블랙캣은 어제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었습니다.

 

"응? 왜 그래? 공주님."

"...블랙캣. 괜찮아요?"

"응?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공주님. 어젠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화냈으면서? 막상 고양이가 옆에 없으니 심심한 거야~?"

"...그럼 그렇지...어서 가던 길이나 마저 가요."

"분부대로~"

 

초원은 길지 않았습니다. 숲을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숲이 나타났고, 앨리스와 블랙캣은 해가 너무 많이 기울기 전에 숲 속 꽤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쐐기벌레를 이 깊은 숲 속 어디서 찾지, 하고 앨리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앨리스의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숲 속 저 멀리서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게 뭐에요, 블랙캣?"

"오, 바로 저기가 쐐기벌레가 있는 곳이야. 쐐기벌레는 엄청난 골초거든. 그것 봐, 고양이 믿어서 나쁠 것 없다니까~"

".....네에..."

 

나무 사이로 퐁퐁 흩어져 나오는 흰 연기를 따라가자 새하얀 담배 연기는 점점 짙어졌습니다. 짙어지다 못해 눈앞에 있는 나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으으...이러다가 나무에 머리 부딪히겠어요..."

"공주님, 나만 따라와. 이 고양이가 길안내에는 일가견이 있다구? 눈 밝은 데는 내가 제일가서 말이야."

 

앨리스는 솔직히 블랙캣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도 달리 도리가 없으니 블랙캣의 손만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앞을 더듬거리며 장님처럼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앨리스는 커다랗고 물컹한 무언가에 정강이를 부딪혀 넘어질 뻔했습니다.

 

"으앗! 아, 블랙캣! 어디가 일가견이 있다는....어? 이건...."

"...버섯이네. 제대로 찾아왔군."

"우후후, 손님은 오랜만이네. 여기엔 어쩐 일이지, 예쁜 아가씨와 고양이 씨?"

 

새하얀 연기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습니다. 앨리스와 블랙캣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점점 연기가 걷히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났습니다.

 

"오랜만이야, ...쐐기벌레."

"오랜만이야, 체셔 캣. 오, 아가씨는 처음 보는 얼굴인걸. 반가워, 난 '쐐기벌레' 알리야야. 뭔가를 물어보러 왔니?"

 

버섯 위에 비스듬히 누워 한가롭게 화려하게 장식된 담뱃대를 빨고 있었던 것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안경 너머로 소녀의 눈이 부드럽게 이지러지며 앨리스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쐐기벌레의 미소가 이상하게 친근하게 다가와서 앨리스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맞다, 왕궁까지 가는 길을 여쭤보러 왔어요. 여기서 왕궁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음, 솔직히 말리고 싶은 계획인 걸. 꼭 가야겠니, 앨리스?"

"네. 가서 여왕이 더이상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고 싶어요."

"...할 수 없지. 왕궁까지 가는 길을 알려줄게.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여왕의 약점은 단 한 가지가 있어."

"와, 그게 뭔데요?"

 

블랙캣의 말을 듣기를 잘 했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앨리스의 눈을 보고 쐐기벌레는 다시 한번 부드럽고 재치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왕이 그렇게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여왕이 부리는 카드 병정들 때문이야. 여왕이 카드 병정들을 조종하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여왕을 어딘가에 가둬 버리거나 멀리 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오, 그건 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데."

 

블랙캣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쐐기벌레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뒤 말을 이었습니다.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카드 병정을 조종하는 힘은 사실 여왕의 부하인 사브리나에게서 나오는 거란다. 여왕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마구 구박하고 있지만... 사브리나가 난 네가 이제 지긋지긋해! 네 곁을 떠날 거야! 이 멍텅구리 여왕! 이라고 소리치는 순간 자기도 끝인 걸 왜 모를까? 바보 같으니."

"그럼 사브리나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여왕에게 등을 돌리게 하면..."

"...여왕을 무찌를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일은 아주 어려울 거야. 사브리나는 여왕에게 자기가 최고의 친구이자 부하라고 생각하고, 여왕의 친구라는 사실을 스스로 아주 자랑스러워하고 있거든. 사브리나를 설득하는 일은 네 몫이야, 앨리스. 하지만 왠지 너라면 잘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안 그래, 체셔 캣? 여왕을 무찌르고 돌아오면 그 땐 나와 함께 버섯이나 한 입씩 하자구."

 

쐐기벌레는 그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앨리스와 블랙캣을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꼬박 하루 밤낮을 걷자 저 멀리 번쩍대는 왕궁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야!!!!누가 내 타르트 못 봤어?!??!"

"여왕 폐하, 그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시끄러워!! 사브리나, 아무리 너라도 내 타르트 먹었으면 머리를 잘라 버릴 줄 알아!! 먹었어?"

"아뇨!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럼 빨리 찾아내!! 누군가 먹었으면 당장 머리를 잘라 버릴 거야!!"

"네, 네에!!"

 

왕궁은 오늘도 다름없이 여왕이 부리는 히스테리로 시끌시끌합니다. 가여운 사브리나는 황급히 사라진 딸기 타르트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보지만 타르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을성이 부족한 여왕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홀로 뛰어나가 재판을 열어야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전부 불러 모아! 장군부터 접시닦이까지 다! 누가 먹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서 사형시키고야 말겠어!"

"네..네에.."

 

졸지에 왕궁 사람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모여야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왕궁 사람들 사이를 씩씩대며 돌아다니던 여왕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습니다.

 

"...이봐, 거기 너."

"네? ...저요?"

"그래, 너 말야. 하트 잭. 내 눈에 네 입에 묻은 새빨간 무언가가 보이는데, 꼭 딸기 즙 같단 말이지."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자의 목을 쳐라!"

"여왕님!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만... 제겐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요! 제발 처형만은..!"

"시끄러워. 어서 끌고 가!"

 

이 광경을 정원 기둥 뒤에 숨어 전부 본 앨리스와 블랙캣은 소리를 낮춰 서로에게 속삭였습니다.

 

"...끔찍하네요. 딸기 타르트 하나 먹었다고 사형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이건 약과라니까, 공주님. 소문에 의하면 하트 여왕은 나비 한 마리가 자기 얼굴로 날아들었다고 왕궁 내에 있는 모든 나비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대. 고양이가 달려들지 않았던 걸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기,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너희들도 파티에 초대받았니?”

 

뒤에서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블랙캣과 앨리스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혹시 여왕의 부하인가 싶어 황급히 돌아본 앨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인자하게 생긴 부인이었습니다. 우아한 드레스와 타조 깃털이 달린 모자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앨리스는 엉겁결에 인사부터 했습니다. 부인이 웃자 그녀의 눈가에 잡힌 웃음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접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녕. 보아하니 왕궁에는 처음인가 보구나. 나는 사빈 쳉이라고 해. 공작 부인이라 그나마 사형당할 위기는 면하고 있지.”

 

쳉 공작부인은 마지막 말을 할 때 소리를 낮추며 재치 있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음이 놓인 앨리스도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도 여왕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거든요. 블랙캣도 그녀를 의심하진 않았는지 한결 안심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머나, 여왕을 치겠다고?”

“네. 제게 계획이 있어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쳉 부인은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앨리스의 결심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한다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게다. 여왕은 자기 기분을 풀려고 파티를 열었어. 거기 초대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널 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의심을 사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부인은 앨리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친숙하고도 어딘가 마음 속이 아릿하게 아려오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너라면 반드시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행운을 빈다, 앨리스.”

 

공작 부인의 응원을 뒤로하고 앨리스와 블랙캣은 왕궁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블랙캣이 어찌나 살금살금 걷는지 누군가가 블랙캣을 보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사브리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궁전 안에 있는 홀에 모여 파티를 즐기는 동안, 한숨과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은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을 때 사브리나는 방 한가운데 있는 식탁에 엎드려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안녕, 사브리나?”

 

사브리나는 홱 고개를 들고 방안을 둘러보다 문 앞에 멋쩍게 서있는 앨리스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왜 나를 찾아온 거죠?”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요.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가만히 보니 여왕이 당신을… 꽤 심하게 대하는 것 같더라고요.”

 

앨리스는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사브리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앨리스는 사브리나가 경비병을 부르며 뛰쳐나가면 어쩌지, 하고 조금 걱정했지만, 사브리나에게는 자기 얘기를 들어준다는 제안이 꽤 매력적이었나 봅니다. 한동안 고민하듯이 눈을 굴리던 사브리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자기 맞은편을 힘없이 툭툭 두들겼습니다.

 

“…난 항상 내가 클로이 여왕님에게 최고의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클로이 여왕님은 가끔 내가 친구도 아닌 것처럼 대할 때가 있어… 그럴 땐 정말 슬퍼. 항상 곁에서 최선을 다해, 여왕님을 위해 일해오고 있는데, 여왕님은 그걸 모르시는 걸까?”

“…..”

 

앨리스는 숨을 골랐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제삼자의 시선을 일깨워주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앨리스는 새삼 실감했습니다.

 

“음, 사브리나…. 그러니까, 저는요… 만약에 누군가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요,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여왕님이 날 친구로 생각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뜻이구나.”

“….네. 맞아요.”

 

사브리나는 한참 엎드린 채 말이 없었습니다. 앨리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 아픈 경험일 테니까요.

 

“….아니야. 네가 틀렸어. 여왕님은 그저 표현을 안 하실 뿐이지 날 분명 친구라고 생각하고 계신다구. 오늘은 그냥 타르트가 없어져서 화가 나셨을 뿐이야.”

 

하지만 사브리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앨리스는 부드럽게 사브리나를 달랬습니다.

 

“사브리나, 굳이 그렇게 여왕님에게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언제든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잖아요?”

“…아니, 난 그럴 수 없을 거야. 나한텐 여왕님밖에 없어. 왕궁 사람들은 분명 그동안 여왕님이랑 내가 계속 붙어다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테고… 여왕님이 없으면 분명 난 외톨이가 될 거야.”

“아뇨, 그렇지 않아요. 사브리나. 내가 당신 친구가 되어 줄게요. 당신이 앞으로 계속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분명 사람들도 사브리나가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아 줄 거에요.”

“정말 그럴까..?”

“네. 그럼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여왕님에게서 도망치면 난 분명 백 걸음도 못 가서 머리가 잘릴 거야! 어떻게 하지, 앨리스?”

“그건….제가 생각이 있어요, 사브리나. 사브리나는 제 말만 들으시면 돼요. 블랙캣?”

 

앨리스가 천장 한쪽 구석을 쳐다보자 옷장 위에 숨어 있던 블랙캣이 소리없이 바닥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깜짝 놀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브리나에게 여유롭게 웃어준 블랙캣은 기지개를 켜며 앨리스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잘 생각했어, 사브리나, 앨리스. 이제 두 레이디들을 무도회장으로 에스코트해 볼까?”

 

 

 

 

 

홀은 시끌벅적했습니다. 모두가 파티를 즐기고 있었죠. 하지만 평소와 달리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빳빳이 든 사브리나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뭐야??? 뭔데??”

 

파티장이 이상하게 조용해지자 여왕은 에클레어를 먹으려다 말고 짜증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브리나를 발견하고 여왕은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뭐야, 사브리나. 대체 얼마나 날 화나게 해야...”

“클로이! 난 이제 네가 필요 없어. 너 같은 애는 이제 지긋지긋해! 널 떠날 거야!”

 

여왕이 사브리나를 향해 짜증을 낸 것과 사브리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친 것은 거의 동시였습니다. 여왕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곧 비웃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비웃음은 곧 경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파티장 주변을 지키고 있던 카드 병정들이 우수수 종이조각처럼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뭐야?! 다들 왜 이래?!”

“...카드 병정들이 쓰러졌다! 여왕을 붙잡아!”

“뭐야?! 내 몸에 손 하나라도 대는 녀석들은 전부 목을 쳐 버릴 줄 알아! 이거 안 놔???”

 

여왕은 뒤늦게 저항해 봤지만 혼자서는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원더랜드 주민들은 여왕을 몰아냈고, 앨리스와 블랙캣은 수많은 원더랜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아이 참, 어딜 갔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시계 토끼를 찾아 눈을 가늘게 뜨고 풀숲 사이를 살피던 앨리스는 제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앨리스가 소리쳐 부르자 어디선가 본 듯한 검은 고양이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입가에는 어딘지 친숙한 미소가 걸려 있습니다.

 

"반가워, 앨리스. 난 체셔 고양이야.”

“어…안녕하세요. 저…실례지만,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요?”

“…글쎄.”

 

"블랙캣이 절 도와 주든 아니든 전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갈 거에요."

"기다려, 공주님!"

 

 

 

“…에휴. 아, 미안해. 난 ‘미친 모자 장수’ 니노야.”

“…반가워요, 니노.”

 

“여기서 다같이 파티나 즐기자고. 앨리스….”

“…다즐링으로 줄까? 아니면 얼 그레이?”

“다즐…우와. 내가 추천하려던 홍차를 귀신같이 알아챘네. 앨리스. 독심술에 취미가 있어?”

“아뇨…딱히 그런 건 아닌데… 블랙캣. 니노. 정말로 저랑 만난 적이 없어요?”

“어….아니. 난 기억 없는데.”

“…공주님이 착각하는 걸 거야. 데자뷰는 의외로 흔한 증상이라던데?”

“…그런가…”

 

"나머지는 그 쐐기벌레에게 물어봐. 왕궁에 간 지가 워낙 오래 되어서 기억이 제대로 나야 말이지."

"알겠어요."

 

모자 장수 일행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앨리스와 블랙캣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모자 장수의 말대로, 북쪽으로 한참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호두와 딱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꺾어 초원을 가로질러...야 했습니다만, 초원으로 나가기도 전에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습니다.

 

'오늘 분명 처음 만났는데... 블랙캣은 마치 소꿉친구처럼 익숙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도 익숙하고. 아무리 물어봐도 블랙캣은 우린 처음 만난 거라고만 하고… 내가 이상한 걸까?”

 

 

 

나무 사이로 퐁퐁 흩어져 나오는 흰 연기를 따라가자 새하얀 담배 연기는 점점 짙어졌습니다. 짙어지다 못해 눈앞에 있는 나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후후, 손님은 오랜만이네. 여기엔 어쩐 일이지, 예쁜 아가씨와 고양이 씨?"

 

버섯 위에 비스듬히 누워 한가롭게 화려하게 장식된 담뱃대를 빨고 있었던 것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앨리스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습니다. 쐐기벌레까지 어디선가 본 것처럼 느껴지다니, 아무래도 자신이 이상한 게 분명했어요.

"어, 그게 그러니까... 맞다, 왕궁까지 가는 길을 여쭤보러 왔어요. 여기서 왕궁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카드 병정을 조종하는 힘은 사실 여왕의 부하인 사브리나에게서 나오는 거란다. 여왕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마구 구박하고 있지만... 사브리나가 난 네가 이제 지긋지긋해! 네 곁을 떠날 거야! 이 멍텅구리 여왕! 이라고 소리치는 순간 자기도 끝인 걸 왜 모를까? 바보 같으니."

 

 

 

공작 부인이 앨리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앨리스는 갑자기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너라면 반드시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행운을 빈다, 앨리스.”

 

 

 

 “클로이! 난 이제 네가 필요 없어. 너 같은 애는 이제 지긋지긋해! 널 떠날 거야!”

 

여왕은 뒤늦게 저항해 봤지만 혼자서는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원더랜드 주민들은 여왕을 몰아냈고, 앨리스와 블랙캣은 수많은 원더랜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체셔 고양이."

"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반가워, 앨리스.”

“어….그냥요?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그나저나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요?”

“…내가 알기로는 없어.”

 

 

 

“블랙캣. 니노. 정말로 저랑 만난 적이 없어요?”

“어….아니. 난 기억 없는데.”

“…공주님이 착각하는 걸 거야. 데자뷰는 의외로 흔한 증상이라던데?”

“…그런가…”

 

 

 

앨리스는 풀밭에 누워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여기…정말 평화로워. 마치 동화 속 세계 같아. 블랙캣도 니노도 모두 굉장히 익숙하고. 정말로…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런 세계 같아.’

 

 

 

버섯 위에 비스듬히 누워 한가롭게 화려하게 장식된 담뱃대를 빨고 있었던 것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앨리스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쐐기벌레의 미소는 앨리스에게 언니 품에 안겨 동화를 읽던 시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카드 병정을 조종하는 힘은 사실 여왕의 부하인 사브리나에게서 나오는 거란다. 여왕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마구 구박하고 있지만... 사브리나가 난 네가 이제 지긋지긋해! 네 곁을 떠날 거야! 이 멍텅구리 여왕! 이라고 소리치는 순간 자기도 끝인 걸 왜 모를까? 바보 같으니."

 

 

 

공작 부인이 앨리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앨리스는 갑자기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아주 많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정작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앨리스 자신도 모르는데 말이죠.

 

 

 

 “클로이! 난 이제 네가 필요 없어. 너 같은 애는 이제 지긋지긋해! 널 떠날 거야!”

 

앨리스와 블랙캣은 수많은 원더랜드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안녕, 블랙캣.”

“…안녕. 공주님.”

“…저 아세요…? 그게, 방금 당신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당신을 블랙캣이라고 불러 버렸거든요.”

“글쎄…우리가 운명이라서?”

“아하하…참 재밌네요.”

 

 

 

앨리스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습니다. 저 멀리 여왕이 사는 왕궁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블랙캣은 몇 걸음 앞서 나가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왜 그래 공주님? 쐐기벌레의 버섯 위에 뭔가 놓고 오기라도 한 거야?”

“블랙캣…뭔가 이상해요.”

“공주님. 괜찮아.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블랙캣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앨리스는 그 말이 불안해하는 아이를 달래려는 어머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리스는 고개를 들어 블랙캣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블랙캣이 아주 익숙해요. 마치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처럼요. 니노도, 알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전부터 아주 친한 친구들이었고 수십 번은 만난 적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사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말이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블랙캣은 예상 외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앨리스는 한 순간 진짜 에메랄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공주님?”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 세계에는 분명,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요. 나는 모르고, 당신은 아는 무언가가.”

 

마지막 말은 확신을 담고 튀어나왔습니다. 앨리스는 블랙캣을 꽉 껴안았습니다. 마치 팔을 풀면 도망가 버릴 검은 고양이를 안는 것처럼요.

 

“…알고 있는 거죠? 블랙캣. 알려 주세요. 너무 불안해요. 평화롭지만 불안해요. 이젠 하나하나가 전부 의심스러워요. 여왕을 물리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니노와 막스는 전혀 미친 것 같지 않은데, 왜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거죠? 알리야는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인데 왜 쐐기벌레라고 불리는데요? 애초에 그 사람들, 누구예요? 전부, 전부 알고 있는 거죠, 블랙캣은.”

“……”

 

한꺼번에 말을 쏟아 낸 앨리스가 숨을 고르는 동안, 블랙캣은 말이 없었습니다. 슬슬 그가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지는 않을지 걱정될 즈음, 블랙캣은 앨리스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습니다.

 

“…앨리스. 네가 어떻게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니?”

“네? 그야 당연히 하얀 토끼를 따라서…어?”

 

앨리스는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였습니다. 분명 새하얀 토끼를 따라왔던 것 같은데, 새하얀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 원래 있던 세계에서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전부 하얀 물감이 섞인 물을 쏟아버린 것처럼 희미했습니다. 심지어는 언니의 얼굴마저도요. 언니가 동화책을 읽어줬던 기억은, 같이 소풍을 나왔던 기억은, 정말 내 거였나? 자신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지자 앨리스는 와락 무서워졌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블랙캣?”

 

앨리스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블랙캣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는 블랙캣이 항상 짓던 위트와 자신감과 다정함이 담긴 미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쓸쓸함과 씁쓸함과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오는 그런 미소였습니다. 당황스러워 굳은 앨리스의 몸을, 블랙캣은 천천히 끌어안았습니다.

 

“…이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다 알아버렸구나, 앨리스. 네가 나를 블랙캣이라고 부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하지만 부탁할게, 앨리스. 여기, 이 세계 속에 있어줘. 나와 함께 있어줘. 제발 부탁이니 모든 것을 모른 척해줘. 여기서 나가려고 하지 말아줘. 내 곁을 떠나지 말아줘…”

 

블랙캣의 두서없고 의미 모를 말이 앨리스의 귓전에서 울려퍼지다 울음소리로 녹아들었습니다. 블랙캣, 지금 우는 거예요? 앨리스는 물어보려다 말고 그저 블랙캣의 등만 토닥였습니다. 블랙캣의 떨리는 어깨가 잦아들었을 때, 앨리스는 다시금 입술을 뗐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반복하고 있었군요.”

“맞아… 너와 나는 계속 ‘앨리스의 모험’을 했어. 네가 나를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고, 여왕을 물리치는 시점에서 끝나는 모험을.”

“이 세계 밖에는 무엇이 있는데요?”

“…깊은 어둠. 끈적끈적하고, 답답하고, 바다처럼 깊고, 의식을 멀게 하고,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하는 어둠.”

“아니, 내 말은 그 밖에요.”

 

블랙캣은 화들짝 놀란 듯이 앨리스를 끌어안았던 팔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앨리스는 웃고 있었습니다. 은방울꽃빛 눈동자가 짓는 그 웃음이 너무나 눈부셔서, 블랙캣은 다시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분명 저 바깥에는, 당신도 알리야도 니노도 사빈도 있을 거예요. 나는, 여기가 아니라 저 바깥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앨리스. 그 어둠을 헤쳐 나가는 건 정말 어려울 거야. 너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부탁이야. 여기는 감옥이 아니라 안식처야. 그 어둠으로부터, 너를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라구. 이번에 헤어지면, 정말로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나는…”

“쉿.”

 

앨리스는 다시금 블랙캣을 끌어안았습니다. 덕분에 블랙캣은 주저앉지 않고 그녀에게 기댈 수 있었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과 모험을 반복했어요.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저 바깥이 궁금해요. 그곳이 내가 살아왔고 살아갈 곳이에요. 블랙캣. 부탁이에요. 우리, 바깥에서 만나도록 해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

 

블랙캣은 앨리스를 꽉 껴안았습니다. 아주 세게, 으스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만큼. 마치 앨리스를 자신의 품에 가두려고 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블랙캣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참 그녀를 안고 있던 블랙캣은, 한숨을 쉬며 앨리스를 놓아주었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 네 진짜 이름을 잊으면 안 돼. 그리고, 나를 기억해. 내가 저 바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줘.”

“그렇게 할게요.”

 

검은 고양이는 목이 다 말라 갈라진 듯한 목소리로 하하하 짧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방울을 떼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것 같으면, 이걸 쥐어서 너를, 그리고 나를 기억해 줘. 부탁이야. 숨을 계속 쉬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잊게 될 거야. 저 어둠에게 지지 마. 내 곁으로 돌아와야 해. 약속해 줘.”

“네. 당신과 약속할게요. 꼭 당신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당신을 저 바깥에서 만날 거예요.”

“그래……”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습니다.

“곧 만나자. …마리네뜨.”

 

세계가 깨어졌다. 나무들이 통째로 뽑혀 나가고 바람은 비명을 질렀다. 저 멀리서 여왕의 카드 병정들이 균열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랗게 깨진 균열 틈새로는 어둠이 울컥울컥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마리네뜨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고정된 곳은, 오직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고양이 소년뿐이었다.

그의 가면이 파스스 깨져 날아가고 있었다. 고양이 귀는 바람에 날아간 건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가면이 깨지면서 드러난 얼굴, 에메랄드색에서 밝은 연둣빛으로 변한 눈동자. 소름끼치도록 사랑스럽고 내게 가까이 있었던 누군가. 그게 누구였지. 마리네뜨는 기억을 더듬느라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참아내며 소년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곧 만나, 사랑해, 마리네뜨.

 

“아드리…!!!”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 마리네뜨가 그의 이름을 채 다 외쳐 부르기도 전에, 어둠이 그녀를 삼켰다. 허우적대듯 휘젓는 손은 이제 더 이상 연인에게 닿지 않았다. 새까만 물결이 그녀의 눈과 코와 입을 막았다. 숨을 계속 쉬어야 해. 마리네뜨는 버둥거리느라 어둠이 그녀를 세계 바깥으로 데려가는 것도 몰랐다. 힘들어. 답답해. 아파. 마리네뜨는 손에 잡힌 방울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저 밖으로 나가야 해. 나가서 그를 만나야 해…

 

마리네뜨는 숨을 쉬어보려고 애쓰며 힘겹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이름이 뭐였더라?

 

 

 

 

 

아드리앙은 눈을 떴다.

 

“….세상에, 아드리앙? 친구?”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니노였다. 자기 집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마운 친구. 아드리앙은 일어나 앉았다. 근육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치고는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와우, 세상에. 난 내 친구가 정말로 관짝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하하… 사실 그럴 생각이었지만 말야.”

 

아드리앙은 잠긴 목소리를 내며 옆에서 잠들어 있는 제 연인을 돌아보았다. 마리네뜨.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물론, 그녀는 입맞춤 한 번에 깨어나 주지는 않았다.

니노는 의자를 가져와 아드리앙의 앞에 앉았다. 학구열과 호기심에 불타는 눈동자에 대한 대답을 아드리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뜻을 담은 헛웃음으로 대신했다. 니노는 타고난 학자였다. 그렇기에 마리네뜨보다도, 아드리앙 자신보다도 더 높은 지식과 마법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거겠지. 사실이지 아드리앙도 조금 놀란 감이 있었다. 그 방대한 무의식 안에 혼자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다니. 마리네뜨의 의식을 잡아낸 것도 대단한데 말야.

 

“니노, 대체 알리야와 너와 막스와 킴과 어머님을 등장 인물로 출연시킨 이유가 뭐야? 클로이랑 사브리나는 또 어떻고.”

“하하… 그야, 마리네뜨가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에 대한 단서를 좀 잡아내길 바랐지. 알리야와 어머님에게 좀 희망을 걸어 봤다구. 클로이랑 사브리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 숙적이었으니까, 화가 나서라도 뭘 좀 기억해내지 않을까 했더니…”

“...사실 그랬어. 계속 반복된다는 걸 기억하더라고.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기억하고. 그래서 내가 세계를 깬 거야.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했거든.”

“음….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모티브가 있으니 조금 수월해질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겠는걸.”

“그 희망이 현실이 되길 바라야지.”

 

아드리앙은 시커멓게 죽은 그녀의 미라클 스톤을 만지작거렸다. 항상 영롱한 붉은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미라클 스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미라클 스톤을 귀에 달고 눈부시게 웃던 그녀의 모습도. 아드리앙은 눈을 감았다. 방금 전에 그녀와 헤어졌는데, 그 순간이 몇 천 년 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잠든 것은 일 년 남짓이었다. 마법의 원천인 미라클 스톤이 모든 마법사에게 하나씩만 허락되는 이 나라에서 두 가지 미라클 스톤을 탐낸 자가 생겨난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힘을 탐낸 나머지 미라클 스톤을 두 개 가진 자에겐 신과 같은 힘이 주어진다는 전설을 믿은 바보 같은 자였다. 호크 모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였으나 끝내는 왕국의 모든 이를 등진 배신자. 같은 마법사를 죽이고 그의 미라클 스톤을 빼앗아 종적을 감춘 그를 왕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적으로 규정했고, 호크 모스가 자신이 믿은 전설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을 상대로 발악하기 시작하였으며 천 년이 넘는 시간 만에 처음으로 마법사 왕국에는 전쟁이 도래했다. 아드리앙도 마리네뜨도,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서사시 안에서나 어렴풋이 볼 수 있었던 그런 전쟁이었다.

 

아드리앙은 호크 모스와의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마리네뜨를 막을 수 없었다. 미라클 스톤을 되찾고 호크 모스를 왕궁에 넘기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바꾸는 데는 죽마고우였던 알리야도,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실패했다. 나의 행운의 무당벌레 소녀는 정의감에 넘치고, 마법사들 사이에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고요한 평화를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항상 그녀를 지켜주던 행운도 그녀의 미라클 스톤을 향해 날아온 호크 모스의 공격을 빗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의사들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걸이 한 쌍 중 하나만 파괴된 덕분에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보전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평생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아드리앙에게는 너무나도 현실감 없고 끔찍한 판결이 내려졌다. 대체 왜? 모든 상황이 그저 영화 속 이야기처럼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지금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거지? 안 돼. 이럴 리 없어. 마리네뜨는 지금 긴 낮잠을 자고 있는 거야. 분명 조금만 기다리면 ‘미안, 내가 너무 잤지 아드리앙?’ 이라고 말하며 눈을 뜨고 웃어줄 거야.

 

처음에는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미라클 스톤을 수리하고, 왕국 최고의 원로 마법사에게 매달리고. 그리고 마지막 희망마저 꺼져 갈 무렵, 아드리앙은 자신의 친우인 니노에게 매달렸다.

 

니노는 마법사들 가운데서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무의식에 흥미를 가지고 그 분야에 깊이 파고든 자였다. 아드리앙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한때 자신과 그녀의 따스한 보금자리였던 곳에 틀어박혀 니노와 함께 연구에만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레이디를 되찾을 수 있을까. 점점 초췌해지는 아드리앙의 몰골을 보다 못한 왕궁 원로 마법사들이 이제 그만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녀를 순교자로서 기리자고 설득했지만 아드리앙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보통 인간보다 영민하고 수명이 긴 마법사라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무리였다.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미친 듯이 크고 깊고 넓은 무의식 내에서 마리네뜨의 의식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 느꼈던 기쁨과 희망만큼, 그녀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실패했을 때 느낀 절망은 컸다. 절망에 짓눌린 채 몸부림치는 데 지친 아드리앙은 결국 니노에게 애원했다. 자신 또한 잠들어도 좋으니 자신과 그녀의 의식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당연히 니노는 펄쩍 뛰며 거절했지만, 아드리앙은 여러 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며 시위하다시피 한 끝에 어거지로 니노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본 오페라 <아이다>속 여주인공처럼, 아드리앙은 자신의 연인과 함께 관에 들어갈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세계를 구축하고, 등장 인물을 설정하고, 플롯을 준비한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연극을 계획한다. 준비가 끝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이건만, 아드리앙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곧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마리네뜨, 기다려, 많이 외롭지? 곧 내가 갈게. 매일 밤 그는 마리네뜨 곁에 앉아 되뇌었다. 실상은 연인을 따라 자살하는 꼴인 주제에, 아드리앙은 마치 결혼이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는 정말이지 기뻤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뻔했다. 목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가기 전에 겨우 참아낸 아드리앙-체셔 캣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이름은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 그와 니노가 만들어 놓은 보험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열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관에 들어가면서까지 희망을 가지다니. 체셔 캣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블랙캣이라고 불렀을 때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블랙캣은 동료들이 자신을 부르던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숨어 뛰어다니며 마법을 쏜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한순간 자신을 블랙캣이라고 장난스럽게 부르며 환하게 웃음짓던 그녀가 온 시야를 가득 채우는 바람에 블랙캣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앨리스가 이미 숲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마리네뜨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혹시... 아니야. 괜히 헛된 희망 갖지 말자.. 블랙캣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그녀를 따라 연극을 시작했다.

 

“그래서, 킴은 꿈 속의 그녀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매일 잠만 잔다나 뭐라나.”

“아하하하, 재미있는 분이네요.”

 

니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환영일 뿐인 존재와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블랙캣은 살짝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니노의 입담에 빠져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마리네뜨를 훔쳐 보며 블랙캣은 홍차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블랙캣....마리네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그렇게 불렀고, 이미 그 호칭에 익숙해져 있는 듯 했다. 이걸로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믿기에는 그녀는 꿈 속 세계에 너무 잘 녹아들어 있었다. 말간 홍차가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새까만 가면을 쓰고 고양이 귀를 단 자신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나는 정말로,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그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참자.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자칫하다간 연극을 망쳐버리게 돼.

 

“….블랙캣?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 아니야. 공주님. 난 괜찮아. 그보다… 니노가 좀 재미있는 친구지. 안 그래?”

“맞아요. 이렇게 재미있는 분이 어째서 미친 모자 장수라고 불리는 거죠? 아하하!”

“그건….솔직히 나도 잘 몰라. 어...재능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라?”

“오호라, 그렇군요.”

 

블랙캣은 그녀가 아무 의심 없이 넘어가자 저도 모르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꿈 속이니까 웬만한 모순이 있어도 잘 알아채지 못한다는 건 참 편하구나.

 

 

 

어느 새 낮이 지나가고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 같은 밤이 찾아왔다. 블랙캣은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익숙한 충족감이 그를 채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수많은 별들이 그야말로 쏟아질 듯이 그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이곳이 과연 꿈일까? 꿈이면 어때.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뭐가 어때서? 어차피 현실에는 그녀가 없는데. ‘저쪽’으로 돌아가 봤자 남아 있는 건 껍데기만 남은 나 혼자뿐인 걸. 그럴 바에는 그녀가 있는 꿈을 영원히 꾸는 게 나아.

 

언제 잠이 들었을까.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새하얀 눈꺼풀을 감은 채 숨을 작게 새근새근 내쉬고 있다. 다행이야. 다시 연극을 시작할 시간이네. 블랙캣은 그녀를 조심히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일어나 공주님.”

“으으음...”

 

그녀의 비취색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나더니, 이내 졸린 듯이 몇 번 깜박였다. 아, 언제 봐도 참 예쁘다.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던 블랙캣은 별안간 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얼어붙었다.

 

“어...저...그러니까.. 공주님?”

 

그녀도 놀랐는지, 자신을 홱 밀치고 일어났다. 아, 저렇게 확 일어나면 어지럽지 않으려나. 그나저나 어떻게 이 상황을 무마하면 되지?

 

"으..아...그러니까 이건....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언니가 매일 깨워주니까... 버릇이 들어서요! 그런 것 뿐이에요.."

"...그렇구나. 잠 깼으면 그만 갈까, 공주님?"

 

‘언니’ 라....그래, 그렇지. 여기서의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아니다. 그녀는 동화 속의 주인공. 자신은 그 동화 속의 등장인물. 하, 하, 하. 뭘 기대한 거야, 아드리앙. 그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이제 희망을 갖는 데는 질릴 때도 되었잖아. 그렇게 자조하면서, 블랙캣은 일부러 싱글대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일말의 의심이라도 갖게 되면, 여기조차도 부서질 거야. 그러면 정말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돼. 정신 똑바로 차려.

 

"응? 왜 그래? 공주님."

"...블랙캣. 괜찮아요?"

"응?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공주님. 어젠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한다고 화냈으면서? 막상 고양이가 옆에 없으니 심심한 거야~?"

"...그럼 그렇지...어서 가던 길이나 마저 가요."

"분부대로~"

 

...다행이야.

 

 

블랙캣은 쐐기벌레 역할을 맡은 알리야와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나누는 마리네뜨를 흐뭇한 눈으로 훔쳐보았다. 그래. 생각났다. 그녀는 학창 시절 자신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면 꼭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곤 했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꼭 토파즈 같았었지. 그녀가 잠든 뒤로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쁨이었다.

블랙캣은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녀의 깊은 밤하늘 색 머리칼과 때로는 남초롱꽃 같은, 때로는 토파즈 같은 눈동자. 분홍색을 띠고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볼. 예쁜 호를 그리며 미소짓는 복숭앗빛 입술. 이 모든 것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그녀와 함께,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니노와 알리야가 하는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정도가 되었어도, 옆에서 함께 걷고 말하고 웃는 그녀는 항상 새로웠고 항상 아름다웠다.

 

그래... 이대로가 좋았다.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저 바깥에서 그녀와 함께한다는 것은 블랙캣에게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꿈이었다. 이대로라면 저 밖에서 자신의 육신이 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 안에 지어진 작은 세계에서, 그것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리라.

 

“블랙캣. 뭔가 이상해요.”

 

아니, 아니, 부탁이야. 그러지 마. 난 이제서야 겨우 안식을 찾았어. 그러니까...

 

“저는 블랙캣이 아주 익숙해요. 마치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처럼요. 니노도, 알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전부터 아주 친한 친구들이었고 수십 번은 만난 적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사실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말이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부터 너는 참 총명했지. 언제까지고 널 속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알고 있는 거죠? 블랙캣. 알려 주세요. 너무 불안해요. 평화롭지만 불안해요. 이젠 하나하나가 전부 의심스러워요. 여왕을 물리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니노와 막스는 전혀 미친 것 같지 않은데, 왜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거죠? 알리야는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인데 왜 쐐기벌레라고 불리는데요? 애초에 그 사람들, 누구예요? 전부, 전부 알고 있는 거죠, 블랙캣은.”

“…앨리스. 네가 어떻게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니?”

“네? 그야 당연히 하얀 토끼를 따라서…어?”

 

블랙캣은 눈을 깜박이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이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 사실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블랙캣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죠? 블랙캣?”

 

마리네뜨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난 뼛속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야. 내가 너 없이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널 여기에 붙들어두었어.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이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다 알아버렸구나, 앨리스. 네가 나를 블랙캣이라고 부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하지만 부탁할게, 앨리스. 여기, 이 세계 속에 있어줘. 나와 함께 있어줘. 제발 부탁이니 모든 것을 모른 척해줘. 여기서 나가려고 하지 말아줘. 내 곁을 떠나지 말아줘…”

 

마리네뜨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결국 터져버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만이 이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반복하고 있었군요.”

“맞아… 너와 나는 계속 ‘앨리스의 모험’을 했어. 네가 나를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고, 여왕을 물리치는 시점에서 끝나는 모험을.”

“이 세계 밖에는 무엇이 있는데요?”

“…깊은 어둠. 끈적끈적하고, 답답하고, 바다처럼 깊고, 의식을 멀게 하고,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하는 어둠.”

“아니, 내 말은 그 밖에요. 분명 저 바깥에는, 당신도 알리야도 니노도 사빈도 있을 거예요. 나는, 여기가 아니라 저 바깥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앨리스. 그 어둠을 헤쳐 나가는 건 정말 어려울 거야. 너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부탁이야. 여기는 감옥이 아니라 안식처야. 그 어둠으로부터, 너를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라구. 이번에 헤어지면, 정말로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나는…”

“쉿.”

 

블랙캣은 마리네뜨에게 힘없이 기대듯 안겼다. 그래. 항상 이랬었지. 항상 나를 토닥이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어. 끝까지 너는 내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구나. 그리고 난 또다시 절망하게 된다 해도, 네가 준 이 마지막 희망에 모든 것을 걸겠지. 나는 이제 너를 이길 수도, 더 이상 너를 붙잡을 수도 없어. 바깥으로 너를 꺼내려는 마지막 시도가 실패한다면, 죽도록 후회하며 일평생을 보낼 것을 알면서도 말야.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고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본다. 깜짝 놀란 듯 잔뜩 커져서는, 내게 고정되어 있는 너의 두 눈동자. 마리네뜨. 너는 나보다 강하니까, 남은 건 네게 맡길게. 우리가 나눈 약속을 기억해 줘.

 

곧 만나. 사랑해, 마리네뜨.

 

 

 

“그래... 친구, 이전에도 말했지만 그녀를 깨우려면 외부로부터 자극을 주는 것이 최선이야. 의도치는 않았지만 내부로부터 자극을 준다는 조건은 충족했으니...”

“그랬지. 내게 생각이 있어.”

 

아드리앙은 자신의 반지를 빼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정확히는 쥐어 주려 했다. 니노가 잽싸게 그의 팔을 붙잡기 전에.

 

“미쳤어? 너무 위험하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한참 자다 일어나더니 내가 한 말도 잊어버린 거야?”

“기억하고 있어. 내 마력을 주게 되면, 자칫 내 마력이 전부 그녀의 미라클 스톤에 흘러들어가서 설사 그녀가 깨어난다 해도 내가 그녀처럼 잠들 수 있다고 했었지. 무슨 상관이야. 이미 관짝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너...!”

“니노. 제발. 그녀가 없으면 난 죽는 건 마찬가지야.”

“......”

“......”

“그래. 알겠어. 맘대로 해봐. 대신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으면 내가 억지로라도 네 미라클 스톤 뺏을 거다. 이것만은 양보 못해.”

“...알았어. 고마워.”

 

니노는 못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물러섰다. 지금 자신의 친구는 러시안 룰렛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아드리앙을 말리지 않는 이유는 아드리앙이 지금 너무나도 지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아드리앙을 막았다가는 그는 정말로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지. 니노는 속으로 탄식을 뱉으며 아드리앙이 무릎을 꿇고 제 미라클 스톤을 마리네뜨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리네뜨. 거기 있지? 부탁이야. 내가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줘.“

 

아드리앙은 간절히 기도하다시피 뇌까리며 눈을 감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곰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내가 왜 아프지?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온통 눈앞이 새까만데. 아, 이제 알 것 같다. 눈 앞이 새까만 건 여기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새까맣고 끈적한 무언가가 내 코와 입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구나.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프구나.

 

자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지, 마리네뜨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혀오는 고통과 끈적한 불쾌감에 자신을 맡긴 채, 정처없이 어둠 속을 떠돌 뿐이었다. 불쾌한 감정들을 제외하고 느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위화감이었다.

 

무언가, 무언가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이 생각해 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였지. 지푸라기 속에서 머리카락을 찾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의 타래 속을 뒤져 보아도 그 ‘무언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였더라. 뭐였지? 너무 열심히 생각한 나머지 불쾌감과 고통마저도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마리네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옅어지는 불쾌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점점, 그녀를 죄어오는 압박감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네뜨는 오히려 긴장했다. 사라지는 고통으로부터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고통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이유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어둠이 옅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둠은 점차 끈적한 액체가 아니라 짙은 안개처럼 변해 그녀를 서서히 좀먹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졸음이 밀려들었다. 편안함이 그녀를 유혹했다. 이대로 가다간, 나는 이 어둠의 일부가 되고 말겠구나. 마리네뜨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무한한 어둠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위화감이 뭔지 알아차려야만 해. 마리네뜨는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연 채 숨을 깊게 쉬어 보려고 애쓰며 머릿속을 뒤져 댔다. 제발 나와라. 대체 정체가 뭐냐고!

 

그 때, 그녀는 오른편에서 변화를 감지했다. 어둠은 잠시나마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마리네뜨는 배에서 떨어진 선원이 널빤지에 매달리는 듯한 마음으로 홱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꽉 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환한 빛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오른손과 두 다리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펼치자 눈부신 구(球)가 보였다. 마리네뜨에게 그것은 태양과도 같았다. 아아, 눈부셔. 이미 어둠에 먹힌 자신의 일부분이 투덜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마리네뜨는 조심스럽게 구를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약간 따뜻할 뿐, 전혀 뜨겁지 않은 동그란 물체. 이게 뭘까...?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구를 관찰하던 마리네뜨의 머릿속에 곧 돌파구가 열렸다.

 

 

 

아주아주 익숙한, 황금빛 방울.

 

 

 

나는, 여기가 아니라 저 바깥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 그리고 내가 저 바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줘.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것 같으면, 이걸 쥐어서 너를, 그리고 나를 기억해 줘. 부탁이야.

 

네. 꼭 당신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곧 만나. 사랑해. 마리네뜨.

 

 

 

“아드리앙...!!!”

 

 

 

-<꿈 속 나라의 앨리스> 끝.-

 

 

 

Epilogue.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드리앙 너는 석 달간 근신이다.”

 

뷔스티에 교수는 왕립 연구원 마크가 화려하게 찍혀 있는 서류철을 탁 닫으며 선언했다. 그녀는 보통의 경우에는 학생들에게 아주 상냥하지만, 필요한 경우 아주 무섭게 혼을 내는 그런 선생이었다. 지금은... 아주 많이 혼을 내고 싶기도 했고, 꽉 껴안아 주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치료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애제자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드리앙은 기쁨과 곤란함과 장난기가 골고루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팔에는 마리네뜨를 꼭 껴안은 채였다.

 

“...아드리앙. 선생님 오셨는데 꼭 이러고 있어야 해...?”

“...선생님. 이해해 주실 거죠?”

“..하아. 치료실에 침대가 두 개 있어 봤자 하나는 쓸모가 없구나.”

 

뷔스티에 교수는 한숨을 쉬고 안경 테를 밀어 올렸다. 빨리 용건을 해결하고 이 행복한 연인이 다시 둘만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근신이라지만, 사실상 휴가나 마찬가지다. 아드리앙, 한 달 후 퇴원하면 적어도 석 달간은 마리네뜨랑 같이 집에만 있도록 하라는 원로 교수진의 특별 주의사항이 있었어. 둘 다 알겠니? 마리네뜨, 너도 디자인 부티크를 다시 여는 건 적어도 내년으로 미루는 게 좋을 거다.”

“으....네에....”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아드리앙이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대답하는 것을 본 뷔스티에 교수는 제자가 제대로 알아듣기나 한 건지 심히 의구심이 들었지만, 꼭 지키라고 못을 박으며 서류철을 두고 치료실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마리네뜨가 잠에서 깨어난 지 거진 두 달이 지나 있었다. 슬슬 언론도 잠잠해지고 대중의 관심도 식은 시점이었다. 물론, 왕립 연구원의 연구진과 교수들은 훌륭한 연구 자료가 되어줄 이 행복한 커플이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그 전에 달콤한 휴가를 실컷 즐겨 두는 것이 좋을 거다. 이 무모한 꼬맹이들아. 뷔스티에 교수는 햇빛이 가득한 복도를 걸으며 미소를 지었다.

 

마리네뜨가 깨어나자마자 니노가 아드리앙의 미라클 스톤을 빼앗은 덕에, 아드리앙의 마력 소비는 예상보다 적었다. 몇 달간 치료원 신세를 져야 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아드리앙은 마력이 충돌해서 둘 다 잘못될 뻔했으면 어쩔 뻔했냐는 원로 마법사들의 꾸짖음에도, 예정된 수명보다 약 5년에서 10년 정도를 덜 살게 될 것이라는 치료사들의 진단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제 옆에 있는 연인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이지, 마리네뜨 일이라면 못 말리는 아이라니까... 옛날부터 그랬지만. 뷔스티에 교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너무 빠졌던 걸까, 어느새 과자와 빵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든 알리야와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니노가 앞에 서 있었다.

 

“교수님, 혹시...아드리앙이랑 마리네뜨 방에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지금 들어갔다간 너희 넷 모두 곤란해질 것 같구나.”

“아하하... 역시 그렇죠? 쳉 여사님이 매일매일 빵을 한가득 들려 보내시는 걸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냥 문 앞에 살짝 놓고 올까봐요.”

“기왕 놓고 올 거면 노크나 한 번 세게 해 주고 오렴. 그 녀석 아마 한 삼 일 정도 치료실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올 거다.”

 

장난기를 담아 말하며 무심코 바구니로 시선을 내린 그녀의 눈에 윤기가 자르르 도는 크루아상이 들어왔다. 아, 환자에게 가는 빵이란 말이야. 이성이 말려 보지만 이미 뷔스티에 선생의 손은 크루아상 하나를 집어 든 뒤였다.

 

“앗, 선생니임!!”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뒤팽 씨와 쳉 여사가 만드신 빵이 여간 맛있어야 말이지. 아...다이어트하려고 했는데, 이미 늦었어. 연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TS 베이커리에 들러야겠구나. 참, 특가 세일은 아직 진행중이라시던?”

“후후후, 네. 마리네뜨가 건강하게 퇴원할 때까지 계속 모든 빵을 반값 세일하신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다고 제가 말렸는데, 제 말은 아무래도 안 들리시는 것 같더라구요.”

“그만큼 기쁘시다는 것이니 다행이지. 쳉 여사는 몸은 좀 괜찮으시다니? 이렇게 빵을 매일 들려 보내시는 데다 세일까지 하시려면 여간이 아닐 텐데. 마리네뜨가 깨어난 지 이제 두 달 정도밖에 안 되었잖니.”

“네. 마리네뜨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신 때부터 급속도로 회복하셨대요. 처음 치료원에서 면회하고 오셨을 때는 완전히 나으신 것 같았다고 톰 아저씨가 그러셨어요. 앗, 선생님, 이제 그만 드세요!”

“으앗, 미안해. 정말이지, 나이를 이렇게 먹어서도 TS베이커리 빵 앞에서는 자제력이 0에 한없이 가까워지는구나. 이를 어쩐담...”

 

민망해하는 뷔스티에 교수와 알리야의 웃음소리에 절로 따라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끼며, 니노는 새삼 긴 터널이 정말로 끝났구나, 하고 느꼈다. 이제, 앨리스가 모험을 떠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동화 속이 아니라 그녀가 있어야 할 곳, 여기 바깥에 존재하니까.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가 앞으로도 계속 마리네뜨와 아드리앙으로 남기를, 니노는 간절히 빌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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