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라푼젤

 - 글. 밤초 / 그림. 감나무

 머나먼 이국, 왕이 통치하는 작은 나라에는 사람들이 거의 출입하지 않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 커다란 숲의 규모와 울창한 자연의 웅장함에 숲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쉽게 길을 잃거나 동물들에게 습격을 당해 돌아오지 못하곤 했다. 숲에 들어가기만 했다 하면 발생하는 일련의 사고에 사람들은 숲에 겁을 먹기 시작했고, 점점 도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인적이 드문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숲을 방문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 또한 대개 도시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아주 운 좋게 돌아온 소수의 몇 명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숲에서 요정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들이 숲에서 헤맨 충격으로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숲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요정의 노랫소리를 들었다며 종일 멍한 상태로 노랫소리를 떠올리기 위해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점점 사람들 또한 그들의 말에 선동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이따금 숲 근처를 지나게 될 때면 다들 숲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늦췄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간헐적으로 들리는 새의 지저귐과 숲을 통과하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정말로, 숲에는 요정이 사는 걸까?
 
 
***
 
 
멀지 않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보다 사람들이 숲으로의 왕래가 잦았을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흙길이 있었다. 지금은 다시 풀이 나고 덤불이 자라 거의 사라졌지만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떡갈나무 두 개가 입구처럼 버티고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듯 똑같은 모양이었지만 오른손으로 왼쪽나무를 짚고 몸을 틀면 비교적 걷기 쉬운 길이 나타났다. 태양이 겨우 보일만큼만 하늘을 가린 나무의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길게 내려온 덩굴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나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나무만큼 길게 뻗은 벽돌벽이 높게 솟아있었다. 탑을 감싸고 자란 덩굴과 색이 바란 벽돌 때문에 얼핏 나무처럼 보였으나 조금만 걸음을 물러 보면 이것이 나무가 아닌 사람이 만든 탑임을 알 수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 끝없이 뻗은 건물은 쉽게 꼭대기에 닿을 수 없는 높이였지만 놀랍게도 탑의 그 어디에도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벽을 타고 올라가기에는 벽돌 하나 삐져나온 것 없이 외벽이 너무나 반듯했고, 감긴 덩굴은 연약했다. 지면 가까이의 벽에는 문은 당연하고 창문이나 작은 쥐구멍 하나 없었다. 과연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맞을지 의문이 가는 것도 잠시, 도시로 연결되는 길과 반대 방향에서 의문의 여인이 나타났다. 망토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 쓴 여인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두어번 목을 가다듬더니 아무도 없는 빈숲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외관과 다르게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가락은 귀에 감기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마치 비단결을 매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는 고요한 숲 속을 가득 채웠다. 여인의 노래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하늘에서 새카만 동아줄이 떨어졌다. 여인은 노래를 멈추고 검은 동아줄을 타고 천천히 탑을 올랐다. 얼핏 위태로워 보였으나 익숙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는 망설임이 없었다. 여인이 도착한 탑의 꼭대기에는 위치를 착각한 것 마냥 대문처럼 큼지막한 창문이 있었다. 검은 동아줄 또한 창문으로부터 나와 있었고 여인은 거치적거리는 옷을 갈무리하고 안으로 몸을 들였다.
 
“사랑하는 마리네뜨, 엄마가 없는 동안 혼자 잘 있었니? 머리는 상하지 않았고?”
 
여인은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녀를 향해 달렸다. 밤하늘처럼 영롱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를 마리네뜨라 부르며 여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밟지 않도록 특히 신경을 썼다.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은 매우 길게 뻗어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땋았지만 그래도 방을 한 바퀴 돌고 바깥으로 삐져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길이였다. 창밖으로 배꼼 나온 것을 보아 여인이 탑을 오를 때 지탱해주었던 동아줄은 다름 아닌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이었다. 여인은 겉옷을 벗지도 않고 냉큼 빗을 들어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빗질했다.
 
왕국에는 유명한 괴담이 하나 있었다. 아이를 훔쳐가는 마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가난한 임산부가 양배추로 끓인 스프를 먹고 싶어 마녀의 텃밭에서 양배추를 훔쳐다가 아이를 빼앗겼다는 괴담이었다. 민가에서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출처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언제 일어났던 일인지, 실제로 존재했던 이야기였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모두가 혹시 모를 봉변에 대비하여 시장에는 항상 양배추가 싼 값에 아주 많이 공급되고 있었다.

 

 

 

 

 

 

 

 

 

 

 

 

 

 

 

 

 

 

 

 

 


마리네뜨의 하루 일과는 지독히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세수를 마친 뒤, 끝을 모르고 자라있는 머리카락을 끝까지 빗는다. 그 과정에서 머리카락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청소를 하며 일이 끝나면 식사를 했다. 그리고 잠시 책을 읽고, 여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서 다시 빗질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인이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다시 머리를 빗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마리네뜨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여인의 성질을 돋우지 않기 위해 마리네뜨는 하루 종일 빗질에 매진해야했다. 일상이 지루했지만 탈피할 방법이 없었고 탑 안의 세상이 전부인 그녀에게는 탑 밖의 세상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 가끔 열어둔 창으로 들어오는 작은 새와 벌레가 그녀를 달래주는 유일한 외부의 방문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네뜨는 전에 없던 실수를 하게 되었고 그녀의 좁은 세상을 커다랗게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리네뜨의 탑은 숲의 가장 안쪽, 왕국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의 방문 또한 매우 드물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탑에 오를 때 마리네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마리네뜨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리면 마리네뜨는 빗을 내려놓고 땋을 머리카락을 힘껏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러면 여인은 머리카락을 타고 탑에 오르는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인밖에 없었기에 마리네뜨는 노랫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조금 일렀지만 희미하게 들리는 노랫소리에 마리네뜨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머리카락을 던졌다. 잘 들리지 않았기에, 어제와 다른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단지 달라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여인의 방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탑을 타고 올라온 자는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의 낯선 소년이었다.
 
“너는 누구야?”
“너야 말로 누구야?”
 
마리네뜨는 낯선 소년을 경계했지만 그를 그대로 두면 팔 힘이 풀려 떨어질 것 같아 일단 그를 탑 안으로 들였다. 단단히 무장을 한 여행자의 차림을 한 소년은 마리네뜨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의 녹음과 같은 색깔이었다. 소년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건물이 보여 잠시 쉬려고 했으나 입구가 없는 탑에 좌절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울해지는 기분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부르니 하늘에서 검은 밧줄이 내려와 호기심에 그것을 타고 올랐다고 설명했다. 마리네뜨는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정말로 순진무구하게 말하는 소년 때문에 조금 경계가 누그러지고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소년은 자신을 아드리앙이라고 소개했으며, 마리네뜨도 따라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시내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어?”
“미안해, 나는 한 번도 탑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마리네뜨의 말에 아드리앙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나가고 싶은 적 없었어?”
 
그 말에 마리네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부족함 없이 보살펴주는 여인에게 감사를 느끼며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바깥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바깥에 대해 물으면 여인은 사납게 날이 섰고, 마리네뜨는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앙의 말에 긍정했지만 표정은 그와 반대였기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갈등을 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마리네뜨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고 달랬다.
 
“우리 함께 밖으로 나가자. 마을로 돌아가면 분명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거야.”
 
아드리앙의 제안이 솔깃했으나 말없이 나갔다가 마을에서 여인을 만난다면 그녀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밖에서 엄마가 나를 알아보면 어떡하지?”
 
그 말에 아드리앙은 방은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지러이 널브러진 작업대가 보였고 소소한 공예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와 자신에게 맞는 작은 가면을 만들어 마리네뜨에게 건넸다. 검은 점박이가 그려진 무당벌레 무늬의 가면이었다.
 
“레이디버그, 행운의 상징이지. 너의 첫 외출에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
“우리, 함께 나가자.”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내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건넨 빨간 가면을 받아들었다.

 



 

bottom of page